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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302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천수

[자식들 오는 거 안 반가워]

화양마을 주민들은 자녀가 농사지으러 귀농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기대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자신이 농사와 갯일로 고생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 아버님이 왜정 때 일본놈들이 땅 개간해 갖고, 그때 우리 아버님이 이민살이를 와 갖고 여기서 나를 낳았지. 내가 1931년생인디, 본토지가 광활여. 난 광활서 낳아서 광활서 늙었어.

나는 자식들 일시켜 먹을라고 허덜 안 혔어, 계획이. ‘너는 학교 대니고, 농사지을 생각 하지 마라.’ 혔어. 우리 애들은 공부만 잘하라 했어. 어려움이 있어도 자식들한테 [농사일을] 안 했어, 내가 허고 말지. 우리 아들 일 안 시킬라고. 그때 고생을 시켰어야 했는데 안 해서 [농사일은] 몰라. 지금도 내가 허고 말지 안 시켜.”[이순구, 1931년생]

광활이 하우스 감자 성공으로 도시 근로자 못지않은 소득을 올리고 있지만 자신의 자녀들을 광활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마을로 들어오는 경우도 부모가 돌아가신 후이거나 본인의 사정에 의한 귀향(歸鄕) 정도이다.

“강길동[가명]은 즈 아버지 죽은 뒤에 [고향으로] 들어왔단게, [지금은] 감자 농사 많이 짓지. 그리고 오꺽정[가명]은 사업하다 안 되 가지고 내려왔고, 지금은 부자여. 김세환[가명]은 원래 여기 출신이고 외지에서 개인 사업했다고 그러더만.”[여옥순, 1931년생]

[힘든 농사 안 지었으면 하지]

광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 어디를 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농사를 짓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물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젊은 시절 열심히 농사를 지어 자녀들을 도시로 유학을 보내고, 그곳에서 자리를 잡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농촌에선 연로해진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사는 경우는 드문 일이 되고 말았다. 종래 우리나라의 이상적인 가족형태였던 대가족은 이제 찾아보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었다.

“내가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는데, 내가 매일 일기를 써. 그날 행사한 거 이런 거. 이런 것이 내 특기는 하나 있어. 그리고 ‘아버지가 걸어온 길과 삶’을 기록해 두었는데, 나중에 자식들이 이 자료를 보면,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우리 아들들 나중에라도 보라고.”[조용환, 1935년생]

[정보제공]

  • •  이순구(남, 1931년생, 옥포리 화양1구 주민)
  • •  여옥순(여, 1931년생, 옥포리 화양1구 주민)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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