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B0202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90번지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갑표

동곡약방 으로 들어서면 바닥에는 강증산[1871~1909년. 본명 강일순. 증산교의 창시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옥(士玉)]이 사용하던 넓은 석판이 있고, 왼쪽 방향으로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물은 옛 방식 그대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다.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우물의 물을 ‘성스러운 물’이라 여기면서 먹을 만큼 물맛이 아주 좋다.

그 옆에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듯 장독대가 놓여 있다. 집 뒤엔 강증산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맑은 대숲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약방의 오른쪽 기둥에는 낡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강증산의 친필이라 전하는 흔적이 남겨져 있다. 사람들의 손에 닳아서 훼손이 심해지던 것을 이 약방에 살았던 최동의 씨가 유리로 싸서 보호하여 겨우 그 글씨 모양은 남아 있다. 그 옆에는 대순진리회에서 이 약방을 인수한 뒤에 이 글씨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겨둔 비석이 있다. 굴뚝 오른쪽으로는 약방을 열었던 1평 남짓한 방안에 약장이 있고, 강증산의 사진과 당시에 사용했던 몇 가지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강증산의 꿈, 민초들의 꿈]

강증산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의 종교적 출발점이 된 곳은 모악산 대원사이다. 강증산은 대원사에 방 하나를 얻어 49일간 먹지도 않고 바깥출입도 없이 목숨을 건 정진 끝에 도를 깨치고 대원사를 나온다.

그 뒤 강증산이 만국의 병든 중생을 모두 다 치유하겠다는 수운 최제우의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뜻을 받들어 ‘광제국’이란 조그마한 팻말을 붙이고 9년 동안 구민 활동과 포교 활동을 펼친 곳이 바로 이 동곡약방이다.

본래 동곡약방은 김형렬의 사촌동생이자 김갑칠의 형인 김준상의 집이었는데, 강증산은 1908년에 발가락의 종창으로 죽을 고생을 당한 김준상의 부인을 고쳐 주는 것을 계기로 김준상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약방으로 사용하였다. 약방(藥房)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강증산은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 주기도 했으며 하인들과 여종들에게도 하대하지 않으며 살았다고 전한다.

강증산은 당시 고난의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민초들에게 꿈을 주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식사라도 대접을 했고, 입을 옷이 없는 자에게는 옷이라도 한 벌 주는 나누는 생활을 했다. 그는 농악 장단에 맞춰 ‘민중이 곧 한울님’이라고 천명하며 천지굿을 벌이기도 했다.

동곡마을 일대에는 증산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지만, 특히 동곡약방은 강증산을 믿고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땅이었다. 지금도 이 약방은 증산교 계통의 사람들, 민족 종교의 원류를 찾는 사람들, 또는 어떤 이유로든 강증산을 찾는 순례자들이 자주 찾아오는 공간이다.

1909년에 강증산이 세상을 떠난 후 동곡약방은 집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고, 몇 차례의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동곡약방과 인근 부지를 사들여 성역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9년 12월 현재 동곡약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지어지고 있으며, 마을 입구 오른쪽의 제비산 끝자락까지 그 영역을 더 넓혀 가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