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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301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해수

[마을의 단합을 상징하는 회관 건물]

내촌에는 마을회관 건물이 두 개 있다. 1982년에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서 지은 예전 노인회관과 1998년에 새로 지은 마을회관이 그것이다.

예전 건물은 공간이 좁고 낡아서 새로 만들었지만, 과거의 회관도 쓸모가 없다고 허물지는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노인회관은 동네 주민 김선균 씨 집안에서 마을을 위해 땅을 희사했고, 주민들이 형편에 맞게 조금씩 쌀을 내어서 지었다. 그때 노인회관 건축을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로 지은 마을회관 내부에 걸려 있고, 노인회관 앞에 건립비도 세워져 있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은 다목적으로 내촌마을회관, 부녀회관, 노인회관, 청년회관 등 입구에 여러 간판들이 다 걸려 있다.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공동의 공간이지만, 주로 주민 대부분이 노년층이어서 ‘노인회관’으로 불리고 있다.

원래 노인회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65세 이상의 회원이 20명 이상 되어야 정부에서 인가를 내준다. 노인회관의 경우 김제시에서 복지를 위해 간식비·운영비·일반 잡비 등 1년에 약 60~70만 원 정도 나오는데, 2009년 현재는 140~170만 원까지 회원이 많은 회관의 경우 정부 지원비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도 고향밖에 없더라]

한동안 비어 있던 예전의 회관 건물은 마을 주민 이수근[1943년생] 씨가 2002년부터 전세를 얻어서 살고 있다.

이 건물은 난방과 수도 시설이 되어 있어 특별히 손보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빈집에 세를 들어 사는 것보다 낫단다.

이수근 씨는 젊은 날 집을 떠나 각지를 떠돌다가 15년 전 나이가 들어서야 돌아왔지만, 그래도 고향이 편하다고 말한다.

그는 내촌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네 사람의 논을 빌려 벼를 경작했지만, 농사일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무작정 상경을 했다. 돌이켜보면, 역마살이 들었는지 결혼을 해서 아들 둘을 두고도 밖으로 돌며 안 해 본 것이 없다시피 일을 했다. 철강회사도 다니고 벽돌공장과 양식장에서도 일하고 고깃배를 타기도 했지만, 결국 어깨를 크게 다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깨를 다쳐서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렵다 보니 생활도 힘들었고, 그동안 잘 돌보지 못했던 가정도 더 이상 기댈 곳이 못 되었다. 그래도 내촌마을은 태어난 고향이고, 아직 형님과 모친이 거주하고 있어 의지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모친이 계시는 형님 집에서 기거했으나, 어쩐지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마을회관으로 옮겨 와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수근 씨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음에도 과거와 현재의 마을일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보고 겪었던 마을 풍경과는 너무 달라진 현재의 모습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한다. 실제로 이 마을은 과거 어느 때는 바다였고 갯벌이었다가 논이 된 공간이다. 예전에는 모시와 뽕나무도 많이 재배하여 누에를 치고 길쌈을 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사람도 변하고 풍경도 변하고]

이수근 씨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몇 가지 마을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세월이 흘러 어린 시절과는 풍경도 많이 변하고 농지 소유주가 바뀐 곳도 많다고 한다.

젊은 날 이 마을에서 논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곳의 토지 중에 임자가 분명하지 않은 땅도 많았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들어와 기존의 농토를 빼앗아 간 것은 물론 수로를 내고 경지 정리를 해서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었기 때문이다. 드넓은 논을 일본인들이 다 관리할 수 없어 소위 ‘마름’들이 대신했는데, 일본 사람들보다도 관리하는 마름들이 주민들에게 더 모질었다고 한다. 8·15해방 후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간 뒤 일본인 명의의 논들은 당시에 경작하던 사람들을 우선하여 정부에서 경작권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논일을 할 수 없는 마을 주민들의 논은 화리로 다 내놓아 농기계를 가지고 있는 네다섯 명의 젊은 사람들이 각각 맡아서 하고 있다. 농기계가 나오기 전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어 나락을 추수할 때는 풍물 소리도 들으며 사람들이 신명을 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는 농사가 된 것이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 해도 너무도 빠르게 과거와 유리되고 있는 농촌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내촌마을의 추수기는 사람 냄새로 풍성했던 과거가 아닌, 콤바인 기계가 순식간에 베고 휑하니 남겨진 논처럼 적막하기만 하다.

[정보제공]

  • •  안우상(여, 1935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 •  이수근(남, 1943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큰뜸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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