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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30103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선희

양순애[호적명 양복자, 1938년생] 할머니는 마을에서 정거장댁으로 불린다. 중멀댁, 진흥댁, 광활댁 등 마을 할머니들 대부분이 지명을 딴 택호(宅號)로 불리고 있는데 정거장댁이라니? 양순애 할머니 집을 물으면 못 찾다가도 “정거장댁 할머니요.” 하면 다 알아듣는 주민들을 보면서 왜 그런 택호가 붙여졌는지 궁금해졌다.

택호는 여자들이 결혼 후 갖게 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도시보다는 반촌 중심의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집이름’이란 뜻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가구에 부여되는 이름으로 집에 여성이 시집을 오면 여성의 출신지, 즉 친정의 지명을 붙여 부부가 같은 택호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반촌에서만 쓰였다는 것도, 부부가 같이 사용했다는 것도 잊히고 시집 온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래서인지 내촌에는 내촌댁도 있고 일촌댁도 있다. 마을 내에서 혼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양순애 할머니의 택호는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고향이 정거장이라는 말일까?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다]

할머니는 고향은 순창 쌍치이나 친정은 내촌마을에 있다. 할머니가 순창 쌍치에서 내촌으로 온 것은 아홉 살 때였다.

일본어를 곧잘 해 학교에서 상도 받았을 만큼 똑똑한 외동딸을 부모님이 내촌 고모 집에서 학교를 다니라고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집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지내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할머니 고향인 쌍치가 빨치산으로 인해 전쟁터로 변했다. 의용군으로 나간 아버지와 큰오빠는 죽고, 집이 빨치산에 의해 불타면서 가족이 모두 내촌마을로 피난을 왔다.

하지만 고모집이 좁아서 할머니 가족은 흩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순애 할머니는 경찰과 결혼해 김제 시내에 살고 있던 사촌언니네 집으로 갔다.

당시 김제는 도시여서 중고등학교가 있었다. 김제에서 생활하게 된 할머니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는 당시 또래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인 스무 살을 넘기게 되었다. 다소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붙여진 별명이 ‘정거장 큰애기’였다.

같은 김제에 속해 있어도 차편이 여의치 않아 김제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내촌을 다녀가는 일이 힘들었을 때, 가끔씩 말끔하게 차려 입은 처자가 내촌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정거장 큰애기가 다녀간다”고 했다. 김제에서 온 도시풍의 처자는 동네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실 그때 정거장 큰애기는 혼기를 놓칠까 은근히 걱정하던 중이었다. 마침 용감한 한 청년이 정거장 큰애기 고모를 통해 청혼을 하였다. 청혼을 받아들인 큰애기와 용감한 청년은 김제역 근처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그 때 처음 본 그 남자가 썩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얼굴은 거무티티하고, 키도 작고, 별로 맘에 안 들었어. 그래서 엄마한테 싫다고 했지.”

할머니는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게 싫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애기는 시내에 살면서 농사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밤마다 와서 데이트를 청하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고양이 소리를 내거나, 돌을 던지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정거장 큰애기를 불러냈고, 그녀는 사촌형부와 사촌언니의 눈을 피해 몰래 몰래 밤마실을 다니며 심야 영화도 봤다고 한다.

결국 할머니는 용감한 청년이었던 할아버지의 정성에 감복해 몰래 데이트를했고, 그사이 정이 들어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마을 대다수 할머니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약혼식도 치렀다.

약혼식은 언니가 집에서 직접 차린 식사를 하며 상견례를 겸해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약혼을 기념하기 위해 김제 읍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후 스물두 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한 양순애 할머니는 그렇게 정거장 큰애기에서 정거장댁이 된 것이다.

농사짓는 것은 싫어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좋아서 고생하는 것도 몰랐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두었지만,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할머니는 홀로 막내를 결혼시키고 지금은 15년 전 옮겨 온 작은 집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지내고 있다.

[정보제공]

  • •  양복자(여, 1938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재너머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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