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148
영어공식명칭 Buyangjae shrin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211번길 5-26[중정리 6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인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세기 초 - 부양재 창건
훼철|철거 시기/일시 1927년 - 부양재 화재로 소실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8년 - 부양재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20년 4월 3일연표보기 -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51호 지정
현 소재지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211번길 5-26[중정리 63]지도보기
성격 재실|신도비
양식 팔작지붕[사당]|솟을대문[문간채]
정면 칸수 4칸[사당]|5칸[문간채]
측면 칸수 3칸[사당]|1칸[문간채]
문화재 지정 번호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51호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 있는 김거익의 재실 및 신도비.

[개설]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 있다. 부양재는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고려가 망하자 부여로 낙향하여 은거한 퇴암(退庵) 김거익(金居翼)을 모신 사우이다. 김거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였던 이색과의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돈독하였는데, 이색의 손녀이자 이종선의 딸을 큰손부, 즉 김승노의 부인로 맞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큰아들 김섭(金涉), 둘째 아들 김도(金渡)와 함께 부여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김거익은 태조 이성계와도 절친하였으나 태조 이성계가 우의정으로 불렀는데도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부양재는 부여 양지 바른 동남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위치]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211번길 5-26[중정리 63]에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앞길을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나오는 중정리 오덕산 자락에 있다.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 뒤쪽으로 김거익의묘[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있다.

[변천]

부양재는 원래 초가로 매우 작고 협소한 재실이었다. 1927년 화재로 소실되자 1928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형태]

부양재는 사당과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 건물이고,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가운데 칸은 솟을대문이다. 신도비는 1922년 유학자 김복한이 글을 짓고 윤용구가 글씨를 썼다.

[현황]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1993년부터 매년 양력 4월 둘째 일요일에 춘향제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부양재 및 신도비김거익의 절의 정신을 기리고 김거익 후손들의 친목을 다지는 사우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