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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24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정의]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창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시기.

[행정 구역]

1. 마산

1914년 3월 1일 부·군제의 실시와 함께 창원부 외서면 마산포 일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마산포의 인구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미달하였다. 그러나 마산항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대일 교역상의 입지적 특성이 중시되어 부로 편제되었다. 마산부로 개편된 이후 구 마산 지역에서는 근대식 시가지 형성을 위한 도로의 신설이나 확장 사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마산의 도로들 가운데 일본인 거류 지역인 신 마산 지역의 도로는 제법 정비된 신작로를 갖추고 있었으나, 구 마산 지역은 상황이 달랐다. 마산부구 마산과 북 마산을 연결하는 도로와 오동동에서 동성동 간의 도로 및 산호동으로서의 연결 도로 등을 개설 또는 개수하였다.

일제는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을 전제로 헌병 경찰의 배치를 대폭 강화하였다. 마산에도 마산 경찰서와 헌병 분대가 설치되었고, 면 지역에는 헌병 분견소가 설치되어 무단 통치의 핵심 억압 기구로 존재하였다.

2. 창원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과 함께 10월 1일자 부령 제7호로 창원부마산부로 개칭되었다. 1913년 조선 총독부의 군·부 합병 시행 조치에 따라 12월 29일자 부령 제111호로 창원군이 분치되었다. 1914년 경상남도령 제2호에 의하여 웅남면·진전면·진동면·구산면·내서면·부내면·동면·대산면·상남면·진해면·웅읍면·웅동면·천가면·진북면·북면 등 15개면으로 확정되어, 1914년 4월 1일부터 면제가 본격 시행되었다.

1931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부령 제103호에 따라 진해면이 읍으로 승격되니 창원군은 1읍 14면이 되었다. 1942년 9월 30일 부령 제242호로 마산부의 관할 구역이 확장되어 창원군 창원면봉암리,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와 구산면의 가포리가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3. 진해

1906년 칙령 48호에 따라 창원군창원부로 고쳐졌으며, 1908년 9월 14일 칙령 69호에 따라 경상남도 진해군과 웅천군창원부로 통폐합되었다. 1901년 10월부터 창원부 일대는 마산부가 되었고, 1912년 1월 진해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관할 구역 변경 시 마산부 구역은 마산부창원군으로 나뉘고 진해면은 창원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1일부터 부령 제11호에 따라 진해는 창원군 웅읍면[이후 웅천면]·웅동면·웅서면·진해면으로 구성되었다. 1931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부령 제105호 읍면제 시행에 따라 진해면 진해읍으로 승격되었다.

진해 군항 지역은 한국인이 살고 있는 현동리·도만리·도천리·여명리·중평리·좌천리·속천리·신좌천리·안곡리 등 11개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일제는 이들 지역에 사는 한국인을 경화동이라 부르고, 한국인 전용 주거지를 형성하여 호당 45평의 택지를 주었는데 여기에는 소수의 일본인들도 살게 되었다. 1906년 당시 진해 군항 예정지였던 곳의 주거 인구는 289호 812명이었다.

진해는 1912년 마산부 출장소를 없애고 창원군 진해 출장소에 진해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진해 면사무소의 관할 지역은 웅천·웅남·상남의 3개면이었다.

[교육 문화]

1. 마산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의 민족 교육 운동은 일제의 식민 교육에 맞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교육 운동으로는 야학 운동과 창신 학교의 민족 운동이 대표적이다. 1907년 마산 지역의 유지들에 의해 마산 노동 야학이 탄생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선창 어시장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었다. 학비를 받지 않고 운영하여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마산 구락부가 마산 학원을 설립하여 경영을 맡으면서 마산 중앙 야학교로 변경되었다.

마산에서는 여성 야학도 설립되었다. 부녀자 교육을 위해 부인 야학이 운영되었으며, 1921년 마산 구락부가 운영을 맡으면서 마산 여자 야학교로 바뀌었다. 마산 여자 야학교는 1921년 6월 마산 여자 청년회를 설립하여 여성의 사회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인 거류지인 신 마산의 노동 야학, 창신 학교에서 운영한 부인 야학, 어시장 노동 야학 등이 운영되었다.

1908년에는 독서숙을 창신 학교로 개명하고 학교 체제를 갖추어 1909년 남녀 공학 정규 사립학교로 인가 받았다. 창신 학교는 일제 강점기 근대적 교육을 통한 민족 의식·주체 의식의 함양과 민족의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마산의 대표적 민족 사학으로 1939년 폐교될 때까지 항일 민족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식민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마산에서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1915년 4월 마산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는 1921년 4월 마산 고등 여학교로 개칭되었다. 또한 1921년 12월 26일 마산 사업 학교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일본인 학생의 교육을 위해 인문계 학교인 5년제 마산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는 언론 탄압을 위해 강제 병합과 함께 우리 민족이 발간하는 신문 모두를 폐간 조치하였다. 그리고 일제 기관지 『경성 일보(京城日報)』와 한글판 『매일 신보(每日申報)』만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가 문화 통치를 표방하면서 마산에도 민족지인 『동아 일보』·『조선 일보』·『조선 중앙 일보』 등의 지국이 설립되었다. 또한 지방 신문인 『남선 일보(南鮮日報)』와 『부산 일보(釜山日報)』 지국도 운영되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이고도 잦은 정간 처분으로 끝내는 하나 둘 폐간되어 갔다.

일제 강점 이후 마산에는 교육·문화 시설 등과 함께 근대적 의료 시설도 출현하였다. 마산 최초의 근대적 의료 시설은 1908~1909년 무렵 구 마산 박석 고개에 일본인 사카다[坂田]에 의해 세워졌다. 이어 구 마산 시장 입구에 홍생 병원(弘生病院)이 개업하였고, 1909년 마산 상공 회의소 건너편에 도쿠나가[德永吾一]가 원장으로 있는 마산 병원이 개원하였다.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인 거류민이 급증함에 따라 의료 시설도 계속 늘어났다. 한국인에 의한 근대 의료 시설도 속속 설립됨에 따라,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은 의료 분야에서만큼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1911년 5월에는 마산에 처음으로 전기가 가설되었다. 일제는 마산항진해 군항의 전기 수요와 급증하는 일인 이주자의 편의를 위해 1911년 3월 한일 와전(韓日瓦電) 마산 지사를 설립하였다. 한일 와전 마산 지사는 마산 시청 뒤쪽에 발전소를 세우고 월남동에 사무소를 열었다. 영업 개시 직후 전기가 가설된 호수는 270여 호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0년에는 마산의 상수도 시설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업의 이권은 일본인들에게만 국한되었다. 그밖에 1920년대 접어들어 마산 의용 소방대·마산 상공회·마산 번영회·마산 경제회·마산 의사회·마산 청년회·실업 청년회·애국 부인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이 설립되었으나, 이들 단체의 장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2. 창원

1919년 이후 1928년 12월 15일까지 설립된 교육 기관은 남면 공립 보통학교·진전면 공립 보통학교·창원 공립 보통학교·진해 공립 보통학교·신방 공립 보통학교·북면 공립 보통학교·내서 공립 보통학교·구산 공립 보통학교 총 8개에 달했는데, 대부분 1920년대 설립되었다. 각 학교의 설립 당시 평균 학생 수는 148명이었고, 1929년 당시 각 학교의 평균 학생 수는 266명었다. 교원 수는 각 학교 평균 5.5명이었다.

정규 학교 외 강습소와 노동 야학에서는 조선어를 중요 과목으로 삼았으며, 교사들이 애국적이며 선진적인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수업의 내용도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강습소와 야학의 이러한 특징은 이후 항일 운동에서 소속 학생들이 앞장 서는 배경이 되었다.

[항일 운동]

1. 마산

마산 지역에서도 3·1 운동을 계기로 청년층 주도의 대중 운동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 운동은 문화 계몽 운동 위주의 실력 양성 운동이었으나, 1920년 중반에 이르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양자가 분화되어 갔다. 마산의 청년 운동은 마산 민의소를 모태로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이권 옹호 자치 기구였으나, 이후 청년 지식인들의 결집체로서 자리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자 마산 청년 구락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맥을 이어갔다.

마산 지역의 주요 사회단체로는 마산 신인회·신간회 마산 지회·마산 청년 연합회·마창 사회단체 협회 등을 들 수 있다. 마산 신인회는 마산 최초의 사회주의 사상 단체로 노동 운동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신간회 마산 지회는 1927년 7월에 설립된 좌우합작의 항일 민족 운동 연합 전선체로 신간회 지회 가운데서도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또 1927년 4월 마산 청년 동맹이 청년 연합회로 나아갔으며, 1928년에는 창원 지역 사회단체들과 연합하여 마창 사회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강점기 마산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제조업과 상업이 활발해져 노동 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노동 운동은 마산 노농 동우회·마산 노동회·마산 노동 연맹 등의 노동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20년대 이르러 민중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가 급증함에 따라 이들을 지도·통제할 기구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에 따라 마산에서는 마산 지회와 삼진 지회, 귀산 지회 등이 설립되었다. 마산 지회는 조선 노동 공제회로부터 일부가 분리되어 마산 노농 동우회로 개칭되어 자율적인 운영을 하게 되었다. 주로 부두의 자유 노동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마산 노농 동우회는 타 지역의 노동 운동에 대한 지원 활동, 노동자 파업과 분규의 중재 역할 등을 수행하였으며, 1926년 2월 마산 노동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20년대 후반 개별 노동조합의 분산 투쟁이 가져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 연맹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마산에서는 마산 노동 연맹이 결성되었다. 마산 노동 연맹의 활동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비교해 더 구체적이고 그 폭이 넓어졌다. 1930년 일제 군국주의의 탄압으로 노동 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점차 지하로 잠복하였는데, 정치적 색채를 띠며 공산주의 운동과 연계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으로 나타났다. 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혁명적 노조 운동으로는 마산 적색 노동조합 조직 계획 사건을 들 수 있다.

2. 창원

1920년대 창원 지역의 항일 운동은 청년 단체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창원에서는 1919년 12월 남면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1920년 6월 창원 청년단이 결성되었는데 회원은 240여 명이었다. 창원 청년단은 근로 대중의 지식 보급과 취업 알선을 위한 야학 운영, 매주 토요일 대중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일반 대중들의 교양 보급에 힘썼다.

창원 청년단이 활동할 무렵 창원군 운산면에서는 취성(鷲城) 청년회 또한 활동하였다. 취성 청년회는 1921년 5월 1000평의 부지 위에 건평 40여 평의 청년 회관을 건립할 정도로 활동이 활발하였다. 남면 청년회 역시 1922년 7월 마산과 창원 등에서 활동하던 청년 단체들의 간부 임원들의 참석하는 간친회를 개최하며 마산과 창원 지역 청년 단체들의 상호 교류를 증진하였고 지역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후 창원 청년단은 1923년 3월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창원 지역의 청년 운동은 1925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여기에는 창원 지역을 대표한 사상 단체 적성회(赤星會)의 역할이 컸다. 청년 운동의 혁신과 함께 창원 청년 연맹이 1925년 4월 결성되었다. 창원 청년 연맹에는 창원 청년회·남면 청년회·소계 청년회·진해 청년회를 비롯한 창원군 내 7개의 청년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한편 여성 단체인 창원 여자 청년 동맹 또한 1926년 5월 40여 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27년 2월 민족 운동의 총 지도 기관으로서 신간회가 출범하면서 각 지역의 청년 단체들 또한 청년 동맹으로 조직적 개편을 단행하였다. 청년 연맹 역시 1928년 2월 창원 청년 동맹으로 거듭나 신간회 창원 지회와 함께 항일 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신간회 창원 지회는 1927년 10월 진해 청년 회관에서 조직되었다. 창원 지회는 가덕도 일본인 순사의 횡포 조사, 상남면 동양 척식 주식회사 일본인 농감의 부정 사건 조사, 창원군 내 각 사회단체 일람표 작성 등과 같은 지역 주민들의 권익 신장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상남면 일대에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 소유의 토지들이 많았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2,000석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작 농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중심이 된 것은 상남 농민 조합이었다. 창원에서 소작 농민들의 조직은 1922~1923년에 결성된 소작인 조합과 소작인 상조회가 시초였다. 이들 조직은 1927년 11월 상남 농민 조합으로 발전하였는데, 상남 농민 조합은 1927년과 1929년 동척의 과다한 소작료 징수에 항거하여 소작 쟁의를 일으켜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밖에 지역 주민들의 항일운동으로는 1923년 7월 일본인 군수가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한 전시 행정에 지역 주민들이 대항한 시위 등을 들 수 있다.

3. 진해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만들어진 23개 단체들은 강연회·토론회 개최, 야학교 설립과 운영, 도서관 설립 등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고양시켜 나갔다. 먼저 진해면의 청년 운동은 1915년 만들어진 진해 청년단이 시초였는데, 1921년 진해 청년 구락부로 개칭하고, 1923년 진해 청년회로 다시 개칭하였다. 진해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단체였는데, 주요 활동은 강연회 등이었으며 도서관과 노동 야학교를 설치하여 문맹 퇴치와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외에도 진해면에서는 진해 제4 청년 동맹·진해 노동 청년 동맹·진해 노동 청년회·창원 청년 동맹 진해 지부·진해 소년회·구학회·전우회 등의 단체에서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배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웅천면의 청년 운동 단체로는 웅천 소년단[소년회]·웅천 청년회 등이 있었는데, 체육회나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진해 지역의 여성 운동은 예배당에서 시작되었으며, 지역 여성들을 위한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 이 지역 여성 운동가들은 진해 지역 여성들만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였으나, 당일 시위에 나서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남이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28년 웅천 여자 청년회를 창립하여 여성 운동을 시작하였고, 1930년 웅동면의 배익우와 혼인하면서 활동을 중단하였다. 웅동 지역의 경우 조맹임이 1928년 웅동 여자 청년회를 창립하여 문맹 퇴치 활동을 하였다. 웅천의 김조이계광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출해 학교를 다니면서 여성 운동을 하였고 경성 여자 청년 동맹을 창립하여 집행 위원이 되었다. 이후 조봉암과 혼인하였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진해 지역의 항일 농민 운동은 ‘돌리 헛 난리’와 ‘진해면 소작 쟁의’와 ‘웅천면 소작 쟁의’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일제가 군항 시설을 위하여 진해 지역의 토지·산림·염전·어장 등을 임의로 점탈하려고 한 데 대한 저항인데, 경상남도 최초의 농민 반격이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후자는 군용지로 매입하기 위해 강탈한 농토 중 당장 군사적 목적에 쓰지 않는 농지를 대여할 때에 일본인들에게만 그것을 준 결과, 일본인들이 지주 행세를 하면서 착취를 한 것에 대한 쟁의였다. 그밖에 웅천면에서도 소작 쟁의가 있었고, 진해 양잠 조합에서도 일본인 조합장을 불신하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웅천 농민 조합에서도 활동을 하였는데 조맹규 등 4명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기도 하였다.

진해 지역에서는 공장 노동자의 항일 투쟁은 일본인이 세워 운영하던 제사 공장과 타월 공장 두 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양잠을 약탈하기 위해 조선에 제사 공장을 설립하기로 추진하였고, 경상남도 쪽에서는 진해 지역에 공장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경화동 지역에 설립하려면 제사 공장은 소작회와 경화동 주민들의 반대 운동 등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1929년 진해의 공장 설립이 동양 척식 주식회사 진해 공장으로 결정되어 소작을 하고 있던 농민들을 몰아내고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 공장의 한국인 종업원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여공들은 대부분 13~18세의 여성들로 35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12시간 근무를 하였음에도, 노임은 일본인과 차이가 많아 최하 30원에서 최고 60원 범위였다. 또한 작업의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임금보다 많은 벌금을 내도록 하여 10전 내외가 되는 임금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일본인 가운데는 연약한 여공들은 구타하는 가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불공정 처우에 불만을 가진 한국인 남녀 공원들은 1932년 11월 20일 밤과 24일 밤에 20여 명이 비밀리에 모여 다음달 10일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모의하였다. 한 명의 밀고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공들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밀의하였고, 연행된 남공 주동자들이 풀려나 합류하여 1932년 1월 4일 새벽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1월 4일 새벽 6시 관리 사무실 앞에서 남자 공원 어삼조, 여자 공원 김말숙이 대표가 되어 요구 조건을 외쳤다. 여기에 직공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회사에서는 경찰에 연락을 하였고 경관들이 들이닥쳐 제지하고 주동자를 연행하였다. 공장에서는 휴업을 하기로 하고 이후 파업 여공들에게 복업을 강요하였다. 경찰에서는 집단 항쟁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경계 근무에 들어갔다.

1월 17일 50명의 여공이 공장장 면담을 요구하자 공장 측에서는 문을 잠그고 면담을 거절하였으며, 이에 여공들은 시위하였다. 경찰이 출동해 해산을 명하였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 시위 중에 연행된 여공들 중 이정수·김복리·이분이·김복남 등은 계류되고, 조동규·배소갑·배호영·배군주·주병택·이기정 등은 선동 혐의로 체포당하였다. 파업단의 활동은 갈수록 기민해져 경찰은 경계를 더욱 엄중히 하였다.

회사 측에서는 급기야 1월 17일부터 여공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기 시작하였으나, 2월 10일 작업을 시작하고자 여공을 모집함과 아울러 파업 주동자들을 해고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찰도 이에 맞춰 1월 30일 변분옥·김차점을 검거하고, 2월 4일 남공 최두도·김영수를 검거하였다.

진해 타월 공장 쟁의는 진해 지역의 후쿠다 타월 공장에서 일어났다. 이 공장에서는 부녀자들이 저임금에 혹사당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장주 측에서 물가가 내렸다는 이유로 임금을 낮추겠다는 통지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여공들이 동맹 파업을 하였다. 이런 집단 행동에 공장주 측에서는 자기의 과실을 자각하고 그 방침을 철회하였다.

[1930년 마산의 피해]

마산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요충지로서 자리매김한 결과 일본인들의 집중적 거주 지역이 되었고, 아울러 진해 군항이 자리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일제의 수탈 정도가 더욱 강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마산에서도 학도병이란 이름 아래 강제 소집 영장이 발부되어 민충식·이진영·정태열·이정우·문호식·조호제·노현섭·하광호 등 다수의 젊은 학생들의 강제로 끌려갔다.

일제가 전시 체제 아래서 우리 민족의 희생을 대량으로 강요한 또 다른 경우는 모집·징용·보국대·근로 동원·정신대(挺身隊) 등을 통한 노동력의 강제 수탈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과 남양군도(南洋群島)를 비롯해 함경도·강원도 등 국내외의 타 지역으로 강제 동원되어 갔다. 전시 노동력 동원에서는 어린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산 시내 각 중등 학생들은 학도 동원이라는 이름 아래 신 마산의 부둣가에 산적해 둔 잉코드, 제련한 고철의 하역 작업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미국 공군의 공습에 대비해 가포 뒷산 일본 신사(神社) 아래 공터에 세워지는 대공포대(對空砲臺) 구축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심지어 마산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 비행장 건설 정지 작업장까지도 강제로 동원되어 갔다. 마산 지역은 식민지 항구 도시라는 특성상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노동력 수탈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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