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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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제정 시기/일시 | 1407년 - 왜관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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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510년 4월 4일 - 삼포왜란 발발 |
관할 지역 | 제포 왜관지(薺浦倭館址) -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었던 조선 시대 왜인들의 숙박 시설이 설치되고 교역이 이루어진 장소.
[개설]
왜관(倭館)은 조선의 개항장에 설치하여 왜인들이 교역하고 거처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공간이다.
창원 진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왜관은 조선 시대 왜인들이 교역을 하던 무역처로 제덕 토성과 제덕동 괴정 마을 사이에 있었으며 왜관지(倭館址)는 지금도 ‘관터’로 불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왜관에는 대마도 도주(島主)의 주재원이 상주하였으며 정부 관리의 감시 아래 매달 6차례의 5일장 교역이 이루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창원의 왜관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1407년(태종 7)에 다른 포구에는 왜선의 정박을 금하고 경상 좌우도의 도만호가 주둔하는 부산포[동래]와 내이포(乃而浦)[제포]에만 정박하도록 무역항을 개항하면서 설치되었고, 왜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용]
창원의 왜관은 숙박과 접대도 겸하던 곳으로 1407년(태종 7)에 다른 포구에는 왜선의 정박을 금하고 경상 좌우도의 도만호가 주둔하는 부산포와 내이포에만 정박하도록 무역항을 개항하였다.
세종 당시 내이포에는 장사하는 왜인 60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창원은 내이포에서 서울로 가는 주된 통행로였다. 대마도의 상선들도 많이 넘나드는 곳이다. 제포의 개항과 왜관이 설치된 이후 대일 무역과 왜인들의 왕래가 늘어나면서 마찰과 알력이 생기게 되어 결국 1510년(중종 5)에 삼포 왜란이 발생하였다.
[변천]
창원의 왜관은 1407년(태종 7)에 부산포와 함께 설치된 후 1418년(태종 18) 염포(鹽浦)[울산]와 가배량(加背梁)[거제]을 추가로 개항하였다. 그러나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되었다. 그 뒤 대마도 도주(島主)[수호(守護)]인 소[宗貞盛, 都都熊丸]의 간청으로 1423년(세종 5)에는 부산포와 내이포, 1426년(세종 8)에는 염포에 왜인의 내왕을 허가해 삼포(三浦)가 개항되었다. 그러나 1510년(중종 5)에 삼포 왜란이 발생하였고 조선 정부는 왜란을 진압한 뒤 삼포를 폐쇄하고 통교를 단절하였다. 이후 다시 제포만 개항하였지만 왜인들이 난동을 일으켜 제포진을 만호진으로 강등시키고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을 내쫓고 왜관을 부산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