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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31
한자 日帝强占期馬山灣埋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허정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10월연표보기 - 마산만 매립 청원서 제출

[정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산만을 매립한 일.

[개설]

개항을 계기로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방대한 규모의 마산만 매립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한 마산만의 매립은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계획되어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 및 투기성 경제 활동의 수단으로 시행된 매립이었다. 마산 도시가 끼고 있던 해안의 간석지가 일본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비용으로 토지를 창조하여 큰돈을 단번에 쥘 수 있는 원시적 축적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매립된 부지 중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공공용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곧 매립을 통한 도시의 수탈이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의 본질이었다.

[매립의 주체]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의 주체는 일본 군부 및 조선 총독부를 비롯해 마산부(馬山府)·기업·개인 등 다양하였고, 단독 매립과 공동 매립이 병행되었다.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시행한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주체들이 매립을 시행했지만 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한국인으로 매립을 시도한 이도 있었다. 마산이 개항되던 1899년 10월 마산포 동성리에 살던 김경덕이 창원 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 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 허가를 받아 매립 공사 착공까지 했다. 하지만 착공 직후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매립의 규모와 횟수]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의 규모는 대략 32만 5000평 정도이다. 1회 매립 면적도 다양하였다.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있었다. 매립을 시도한 횟수는 개항기인 1899년부터 1909년까지 9회, 1910년부터 1919년까지 2회, 1920년부터 1929년까지 3회,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회로 총 29회였지만 개항기 매립 중 5회는 계획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마산만 매립의 횟수는 총 24회였다.

[매립의 목적]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의 목적은 다양하였다. 항만 건설을 비롯해서 농지로 사용하기 위한 매립이 있었는가 하면 군용지 혹은 철도 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한 것도 있었고, 기업과 개인에게 분양을 목적한 것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임대를 목적으로 매립하기도 했고, 자신의 사업장을 확대하기 위한 매립도 있었으며, 부두를 건설하기 위한 매립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마산만에서 행해진 모든 매립은 도시 전체의 균형 발전과 시민들의 편익을 위해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 및 투기성 경제 활동의 수단이 매립의 목적이었고, 조선 총독부가 시행한 부두 건설용 매립 공사는 침략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형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매립하였기 때문에 마산만 매립의 형태는 다양하였다. 하지만 모든 매립에서 둑을 보호하는 호안(護岸)은 모두 직선형 석축으로 조성하였다. 그 결과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마산 해안은 북쪽으로 오동교에서 남쪽으로 현 마산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직선형의 석축 호안이 조성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은 남북 축에 비해 유난히 좁고 경사가 급한 동서 축을 가진 마산 도시의 지형적 문제점을 일부 해소시키면서 도시 범역을 키우는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도시의 장기 계획에 의해 체계적으로 시행된 매립이 아니라 각 시기마다 매립 주체의 필요에 의해 시행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총 매립 규모가 32만 5000평이나 되는 대규모였지만 도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공원 등 공공용지는 전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관동 대지진 때 발생한 잔해를 이용해 조성한 요코하마의 야마시다 공원과 크게 비교된다. 공유 수면인 바다를 매립하였지만 공공의 이익을 외면한 일제 강점기 마산만 매립은 균형 잡힌 도시 발전을 저해하였고 그 폐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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