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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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頀紡織 |
영어공식명칭 | Samho Spinning Co. Ltd.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1가 107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설립 시기/일시 | 1948년 3월 - 삼호방적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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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51년 12월 - 삼호방적에서 삼호방직으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삼호방적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1070 |
성격 | 제조업체 |
설립자 | 정재호 |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 있었던 면방직 제조업체.
[변천]
삼호방적은 1948년 3월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 자본금 3억 원으로 설립한 면방직 전문 제조기업이다. 창업자 정재호는 1932년 4월 오사카 한신메리야스공업사[阪神莫大小工業社]에 입사하여 경영 수업을 한 후, 1935년 5월 일본에서 귀국하여 서문시장에 가내공업인 삼호공업사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삼호메리야스[三護莫大小] 공업사를 설립하여 서민의 생활필수품인 양말과 내의를 생산하였다. 1948년 11월에 방기[방적기계] 2,800추를 설치하고 조업을 개시하였으며, 1950년 12월에는 방기 3,200추를 설치하여 생산능력이 총 6,000추로 확대되었다. 1951년 12월에 적산 어망 기업인 계강회사(溪鋼會社)를 불하받은 후 자본금을 10억 원으로 증자하여 삼호방직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52년 3월에는 방기 1,200추를 증설하여 전국 규모의 섬유업체로 부상하였다. 당시 삼호방직의 면사 생산량은 1950년 19만 6797근에서 1954년에는 515만 8518근으로 5년 만에 무려 26배로 급신장하였다.
1952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면방직 시설의 70%가 피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한 극심한 생산 차질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면직물인 광목 1필(疋)의 가격이 1950년 12월 기준 6만 3000원에서 1951년 12월에는 17만 5000원으로 올랐다. 대구에 있던 삼호방직은 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고, 오히려 전시 특수로 인하여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6·25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UN한국재건단[UNKRA]이 복구 작업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1960년까지 총 1억 2200만 달러의 원조 자금을 쏟아 부었다. 정부는 장기 부흥 계획에 의거하여 방직 시설 확충을 위하여 1953년까지 총 591만 647달러의 원조 달러를 14개 방직 기업들에 대부하여 주었다. 당시 삼호방직은 47만 1000달러의 특혜 대부와 UNKRA 등의 지원을 받아 시설 확충에 사용하였다. 삼호방직은 1957년에 직기 300대와 방기 3만 1600추의 대규모 섬유업체로 거듭났다. 당시 삼호방직에서는 ‘태백산’ 상표의 광목과 ‘종표’ 타래실, ‘무궁화표’ 고급 면사 등을 생산하였다.
삼호방직은 1951년 10월에 대전직할시 유천동 10번지에 있던 풍한방직[전 조선오우방적(朝鮮吳羽紡績)]을 21억 5000만 원에 불하받아 1953년 3월에 대전방직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에는 ‘6·25전쟁 특수’로 확보한 자금으로 최대 규모의 면방업체인 조선방직 부산공장까지 불하받았다. 1959년 10월에는 조선방직을 인수함으로써 정재호는 직접 창업한 삼호방직 외에 적산인 조선방직과 대전방직까지 확보하여 국내 최대의 방직 재벌 기업가로 도약하였다.
1960년대 면방직 공업은 적합한 기후 조건과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공업화를 이룩하였으며, 계속적인 시설 확장과 기술의 개발,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1960년 중반 이후부터는 수출 주도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대구 지역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삼호방직은 경기 불황이 겹치고 화학섬유의 등장과 방만한 경영, 기계의 노후화 등이 겹치면서 업종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의의와 평가]
삼호방직은 면방직 공업에 적합한 지역의 기후 조건과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근대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초기 수입대체산업으로 발전하던 삼호방직은 계속적인 시설 확장과 기술의 개발,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1960년 중반 이후부터는 수출을 주도하면서 지역 섬유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면방 산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