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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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해숙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에서 언어, 문자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개설]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은 예로부터 문학작품의 주된 소재가 되어 왔다. 특히 압구정, 봉은사, 저자도, 사평, 선정릉 등은 여러 문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형상화되어 왔다.
[압구정 관련 작품]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조 세조에서 성종대 까지 3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했던 한명회(韓明澮)가 만년에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지어 여생을 보냈던 정자이다. 당시 성종(成宗)이 친히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지어 내리자 조정의 여러 문사들이 어제(御製)에 화운(和韻)하여 수백 편의 시를 짓고 서거정(徐居正)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는데, 그 때 서거정이 지은 서문이 바로 「어제압구정시서(御製狎鷗亭詩序)」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까지 6명의 임금을 섬기며 45년간 조정에 몸담고 23년간 문형(文衡)을 관장하면서 당대 학문의 흐름을 이끌어 갔던 인물이다. 서거정은 이후 한명회가 다시 간절히 시를 요구하자 「응제압구정시(應製狎鷗亭詩)」 6수를 지었는데, 여기서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한강변에 압구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는 한명회를 생각하며 압구정 주변의 풍광을 배경으로 담박한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 또한 「한판서압구정시(韓判書狎鷗亭詩)」에서는 한명회가 관직에서 물러나 압구정을 짓고 산수 사이에 은거하게 된 것을 찬미하면서, 중국 송(宋)나라의 명신(名臣)인 한기(韓琦)의 서실(書室) 이름이 압구정이었던 것을 들어 압구정이 오래도록 흥성하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서거정 외에도 강희맹(姜希孟)의 「응제부압구정사시(應製賦狎鷗亭四時)」, 기대승(奇大升)의 「압구정(狎鷗亭)」 등 여러 문인들이 압구정을 소재로 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재 강남구에는 이 정자의 이름을 붙인 압구정동이 있는데, 강남개발로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면서 지대를 높이고 한강제방을 쌓으면서 원래 정자의 터는 사라졌다.
[봉은사 관련 작품]
봉은사(奉恩寺)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동호(東湖)의 독서당(讀書堂)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에 당대 석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그런 까닭에 당대 시인묵객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쓴 「봉은사기(奉恩寺記)」는 봉은사를 둘러싼 여러 가지 풍경을 묘사한 작품으로, 전각(殿閣)에 올라 느끼는 시원한 기운과 연꽃의 향기, 매화의 그윽한 자태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봉은사의 모습을 표현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절을 찾는 여러 손들의 북적이는 모습을 통해 당시 봉은사가 여러 시인들이 풍류를 즐기러 모였던 도성 근교 명승(名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정약용(丁若鏞)의 「초가을에 중형을 모시고 봉은사에 노닐며(早秋陪仲氏遊奉恩寺)」는 그의 나이 21세 되던 1782년 가을에 봉은사에 머물며 경의(經義)의 과문(科文)을 익히던 무렵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봉은사에서 노닐던 감회를 읊은 한시이다. 예전에 봉은사에 가려면 마포나루나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강변을 따라 한참 동안 걸어갔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배를 타고 나가 강변을 따라 난 길로 찾게 된 봉은사의 정취를 담박하게 잘 표현하였다.
또한 「봉은사에서 잠을 자며(宿奉恩寺)」는 정약용이 1785년 봄 진사에 급제한 후 예전에 과문을 익히기 위해 머물렀던 봉은사를 다시 찾아 밤을 보내며 지난 일을 회상하며 지은 작품이다. 그 밖에 성현(成俔)의 「봉은사(성현)」, 정래교(鄭來僑)의 「봉은사(奉恩寺)」, 이덕무(李德懋)의 「봉은사매화료(奉恩寺梅花寮)」 등도 유명하다.
[사평 관련 작품]
사평(沙平)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남동과 마주하는 지금의 강남구 신사동 일대로 서울특별시에서 남부지방으로 오가는 길목 중의 하나였다. 백사장이 넓게 퍼져 있어 이 일대를 사평[모래벌]이라고 하였다. 사평 북쪽의 나루터는 교통의 요지로 고려 때 사평도(沙平渡)라는 나루를 설치하였고 이후에 숙박소인 원(院)을 설치하여 사평원(沙平院)이 마련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사평원 누대에 쓰다(題沙平院樓)」, 이색(李穡)의 「사평도가(沙平渡歌)」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선정릉 관련 작품]
선정릉(宣靖陵)은 조선조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다. 이 두 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고 하는데, 이익(李瀷)은 「선정릉(宣靖陵)」이란 작품에서 전란 때 능침(陵寢)이 훼손된 일을 떠올리며 그 원통함을 표현하였다. 권필(權韠)의 「이릉을 지나며 감회가 일어(過二陵有感)」 역시 전란 때 능침이 훼손된 일을 개탄하고 두 왕릉을 지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저자도 관련 작품]
저자도(楮子島)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 있었던 한강의 섬으로, 한강이 범람할 때마다 압구정동 일대가 수몰되자 저자도의 흙을 활용하여 매립한 까닭에 현재는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라는 명칭은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예전에 저자도는 흰 모래와 갈대숲이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고려시대 이래로 명사들의 별장이 많았다. 고려 말 한종유(韓宗愈)가 처음으로 여기에 별장을 지어 노후를 보냈는데, 그는 「저자도(楮子島)」라는 한시를 통해 만년에 명예롭게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저자도에서 지내며 강상(江上)의 풍경과 정취를 즐기는 감회를 잘 표현하였다. 백광훈(白光勳)도 「저자도(楮子島)」라는 한시를 남기고 있다.
[현대문학 작품]
오래전부터 강남구의 주요 공간은 문학으로 다양하게 형상화되어 왔는데, 현대에 이르러서 강남이나 압구정동은 서울특별시의 개발사업 진행과 더불어 다양한 도시 인프라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문학작품에서 주요한 도시 공간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과밀화되어 가고 있는 구시가지의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강북의 많은 소비관련 업종이 강북에서 가까운 신사동, 논현동, 압구정동 일대로 이전하게 되었다. 강남개발로 인한 부동산 붐 속에서 이 지역은 고소득층들을 위한 소비 공간으로 발전하였고, 고급상점가로서 배타적인 고급 소비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대표 작품으로 유하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소비와 욕망의 문화를 잘 묘사했고, 이순원의 장편소설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압구정동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등의 작품은 현대 소비문화와 욕망의 상징으로 도시를 그리면서 현대 도시의 성적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고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파헤치고 있다. 이처럼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은 그동안 고전과 현대를 아울러 한국문학에서 주요한 공간으로 형상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