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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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榮昌 事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주혁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97년 - 이영창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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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이영창|여환|장길산 |
[정의]
1697년 경기도 가평 출신 서얼 이영창이 장길산 세력과 연합하여 역모를 꾀한 사건.
[역사적 배경]
이영창 사건은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예언서인 『정감록』 등이 유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사회에는 혼란한 사회상을 타개해보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영창 사건의 경우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서얼 및 중인 계층이 장길산(張吉山)과 연합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한 시도였다. 당시 장길산과 휘하 농민군 세력은 황해도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 일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영창 사건의 주도 세력과 장길산 세력은 서로 계층은 달랐지만, 사회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연대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과]
이영창 사건은 1697년(숙종 23)에 발생하였는데, 승려 여환(呂還)이 주도하였다. 여환(呂還)은 거사 계획을 짜고 제자들을 각 도에 보내 전국의 승려를 포섭하였다. 이때 이영창(李榮昌)은 서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조정의 정세를 정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실제 무장 투쟁을 이끌 여러 인물을 차례로 포섭하였고, 한양으로 진격할 때 장길산의 부대가 합류한다는 거사 계획을 짰다. 그러나 일부 서얼들이 이영창을 남인의 첩자로 의심하여 노론 세력에게 밀고하면서 거사가 무산되었다.
[결과]
이영창은 역적으로 몰려 처벌받았다. 또한 이영창이 가평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평군은 군에서 현으로 격하되었고, 수령의 직위도 현령으로 낮추어졌다. 대역 죄인이 탄생한 고장에 대해 의례히 내려진 조치였다. 이후 10년 뒤인 1707년(숙종 33) 다시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영창 사건은 체제 부정적인 논리를 포함하였으므로, 민심을 크게 동요시키는 등 파급효과가 적지 않았다. 흔히 한 지역에서 저항 운동이 발생하면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는데, 당시 민중들의 불만과 불안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