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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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慎守彛 |
이칭/별칭 | 군서(君敍),황고(黃皐),취한당(就閑堂)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688년 - 신수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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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68년 - 신수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08년 - 신수이 구연 서원 배향 |
출생지 | 신수이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
거주|이주지 | 신수이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묘소|단소 | 신수이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
사당|배향지 | 구연 서원(龜淵書院)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거창(居昌) |
[정의]
조선 후기 거창 출신의 문인.
[가계]
신수이(慎守彛)[1688~1768]의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군서(君敍), 호는 취한당(就閑堂)이다. 황고(黃皐) 선생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신경호(慎景昈)이며, 아버지는 신부(慎桴)이다. 어머니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문송(文頌)의 딸 남평 문씨(南平文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이광익(李光益)의 딸 증숙부인(贈叔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조한명(曺漢鳴)의 딸 숙부인(叔夫人)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활동 사항]
신수이는 1688년(숙종 14) 7월 15일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서 태어났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에게 학문을 배웠다. 1737년(영조 13)에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인재를 천거하면서 신수이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다가 재능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1767년(영조 43)에 아들 신인명(慎認明)이 시종관이 되자 왕이 신수이에게 통정대부의 품계를 제수하고 첨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768년(영조 44)에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있던 아들 신인명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수이의 저서로는 『황고 선생집(黃皐先生集)』이 있다.
[묘소]
1769년(영조 45) 3월 1일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북쪽 직장산 기슭 갑좌(甲坐) 경향지원(庚向之原)에 안장하였다가 1887년(고종 24) 11월에 5대손인 신병주(慎炳㴤)가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산32번지에 창녕 조씨 부인과 함께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수이 사후 1808년(순조 8)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던 구연 서원(龜淵書院)에 추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