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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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斗壽 |
영어음역 | Yun Dusu |
이칭/별칭 | 자앙(子仰),오음(梧陰),문정(文靖),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시대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사용 윤희림(尹希林), 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 어머니는 부사직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동생이 윤근수(尹根壽)이다.
[활동사항]
윤두수는 이중호(李仲虎),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저작을 거쳐 이조참의, 공조참의, 형조참의, 호조참의, 대사간,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선조 10)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도승지가 되었다. 1579년 연안부사를 거쳐 한성부좌윤에 오르고 이어 부총관, 형조판서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는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 평양으로 몽진했을 때 좌의정에 올랐는데, 평양이 위급해지자 모두가 함흥으로 몽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의주로 가도록 하였다. 후에 함흥이 함락되자 그 선견지명이 찬양받았다. 1594년 세자를 호종하고 남하하여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로서 왕비(王妃)를 해주로 호종했다. 곧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남파(南坡)로 돌아갔다. 윤두수는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오음유고(梧陰遺稿)』, 『기자지(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사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