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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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의미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한기문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을 종지(宗旨)로 활동하는 종교.
[개설]
구미 지역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연원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신라시대에는 불교의 초전지로, 고려시대에는 종단 불교의 번성지로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처음 전파될 때 모례(毛禮)의 후견으로 처음 전래한 지역이 되었고, 처음으로 전파한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도리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도 의천(義天)의 문도가 주석한 천태종 육산문의 하나인 남숭산문(南崇山門) 선봉사(僊鳳寺), 고려 말 해인사에 있던 실록을 한때 보관한 득익사(得益寺), 화엄승 혜각(慧覺)의 하산소로 지정된 주륵사(朱勒寺), 고려 후기 유가종의 미수(彌授)가 출가하고 후에 미수의 문도가 주석한 원흥사(元興寺), 고려 말 화엄승의 법손이 주지한 수다사(水多寺) 등 중요 사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다사·대둔사 등에서 사명대사가 의승(義僧)을 결집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고, 근대에도 해운사·봉죽사·원각사·금강사 등이 창건되었다.
[삼국시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경로는 여러 길이 있지만 고구려를 통한 육로 경로의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육로 경로 중에서도 죽령로(竹嶺路)보다 계립령(鷄立嶺)을 통하여 일선을 경유한 경로가 가장 주된 것이었다. 이는 경주의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정복해가는 과정에서 상주의 사벌국으로 진출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라 불교 전래의 두 주역인 아도와 모례에 관한 기록은 다수 있지만, 대략 정리되는 것은 아도는 신라 불교 전도승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이고, 모례는 고구려에서 오는 전도승을 숨겨주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후견인으로 대표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모례는 고구려 문물을 일찍 접하고 신라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지방 지배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고, 이에 따라 일선의 유력한 세력인 모례는 왕실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불교의 수용 주체는 왕실이었기 때문에 일선의 모례는 왕실의 불교 수용의 움직임에 따라 신축적으로 대응한 후견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아도가 도리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도리사조에 전한다. 본래의 도리사는 재와 먼지가 되어 절이 없어졌고, 현재의 도리사는 본래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후대에 중창되었다. 본래 도리사의 위치는 현재 냉산의 남록 즉 현 도리사로 올라가기 전 계류변에 있는 장대한 석축지로 추정된다. 현 도리사에는 아도와 관련된 유물·유적으로 아도화상 사적비, 아도화상 좌선대, 아도화상 석상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인근 봉한리 사지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은 신라 통일 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도리사 세존사리탑에서 출현한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작품으로 추정되어 도리사 일대가 일찍부터 불교 성지로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1. 고려 전기 천태종 남숭산문 선봉사
금오산 자락의 선봉사지에는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출가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의 비가 있다. 이 비의 건립 사정은 다음과 같다. 1101년 의천의 죽음으로 문도들이 이합집산하는 가운데 1137년(인종 15)에 순선(順善), 교웅(敎雄), 유청(流淸) 등이 남숭산(南崇山) 선봉사에 의천의 비를 세움으로서 다시 산문을 결집할 수 있었다. 천태 오문과 더불어 남숭산문을 합쳐 천태육법권(天台六法眷)을 형성하였고 고려 후기에도 천태 육산(六山)이라 하여 계속되었다.
이규보(李奎報)가 1196년 상주를 방문하고 남긴 남유시(南遊詩) 51수 중에 12수가 원흥사와 관련된 시이다. 시에 나타난 원흥사는 낙동강에 접해 있고 많은 돛배가 모여들고, 강중(江中)에는 노자석(鸕鶿石)이 있었다. 영산부곡에 관한 시를 통해 원흥사는 가덕부곡(加德部曲)과 영산부곡(靈山部曲)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교통 요지에 입지한 궁벽한 곳의 원흥사는 인근 부곡을 지배하여 사장(寺莊)을 형성했을 것이다. 원흥사는 낙동강 본류에 접하고 있어 낙동강 수로 교통의 중간 기착지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원흥사 앞 강중(江中)의 노자석(鸕鶿石)과 대탄(大灘)은 수로 교통의 위험물이었으므로 원흥사는 수로 교통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고려 후기 유가종단이 배출한 국사(國師) 3명 중의 한 고승인 미수(彌授)의 비문에 따르면, 원흥사는 미수가 출가하고 그의 첫째 문도가 주석한 사찰로 유가종단 소속이었다. 이 시기에 원흥사는 유가종단의 중요 사찰인 중앙 지역의 숭교사(崇敎寺), 중부권 지역의 장의사·중흥사·흥덕사·법주사, 남부권 지역의 유가사·동화사·불국사·기림사·남백월사 등을 이어주는 낙동강 수계상의 사찰로서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혜각은 화엄승이다. 혜각 비의 비문을 지은 안진(安震)은 1313년(충선왕 5)에 과거에 급제하고 1318년에 원의 제과에 급제한 인물로, 비문을 찬한 시기는 적어도 1313년 이후이며 주륵사에 세워진 비에 비문이 새겨진 것도 역시 그 이후이다. 혜각의 제자로 화엄종 보응대사(普應大師) 인원(忍源)이 있다. 인원은 체원의 가형이며 체원은 1280년대 초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혜각은 1290년대 초반에 사거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문도에 의해 주륵사에 추증 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찬한 안진이 원의 제과에 합격한 후 귀국한 시기가 1320년대로 추정되므로 이 시기에 화엄종 문도가 주륵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을 것이다. 이 무렵에 혜각이 국사나 왕사로 추증된 것이 확실하므로, 주륵사는 국사나 왕사의 문도가 독점적으로 장악한 하산소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김수온(金守溫)이 남긴 「수다사상전기(水多寺相傳記)」에 따르면 수다사는 화엄승통 화옹(和翁)에서 시작하여 해유(海乳), 성관(性寬), 학의(學誼)에 이르기까지 법손(法孫)이 주석한 사찰이라 하였다. 학의는 수다사에 장년춘추수륙지보(長年春秋水陸之寶)를 설치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지원도 받았다. 즉 수다사는 효령대군의 원당이 된 것이었다.
[근현대]
도리사·대둔사·수다사가 전통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가운데 근대에 이르러 해운사·봉죽사·원각사·금강사 등이 창건되었다. 구미 지역에서 조계종단에 속한 사찰들은 거의 김천 직지사(直旨寺)의 말사로 편제되어 있다. 현재 조계종·천태종·태고종 등 각 종단에 소속된 사찰들은 구미사암주지연합회를 결성하여 불교 중흥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