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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236
한자 朴泰熙
영어음역 Bak Taehui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전대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인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성별
생년 1926년연표보기
대표경력 옥계교회 담임목사

[정의]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종교인.

[개설]

박태희옥계교회를 설립한 박용하의 12남매 자녀 중 여덟째(아들로는 셋째)로 태어났다. 처는 박태희보다 7살 아래로 옥계교회에서 분가해 나간 성전교회의 신자였으며 장모가 그 동네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다녔을 만큼 신앙이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형제 중 맏아들과 차남이 옥계교회의 장립집사이고 셋째 아들이 서리집사이며, 맏사위가 상모교회 장로이고, 막내 사위가 울산에서 목사로 있는 등 온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박태희의 신앙생활은 아버지 박용하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용하는 삼형제 중 둘째로서 선교사들이 인동교회 일을 보고 있을 때 혼자 3년 동안이나 인동교회에 다녔다. 박태희의 어머니 영월정씨(寧越鄭氏)는 옥계동 맞은 편 가락마을에서 시집왔으며 박용하와 중매결혼을 한 후 전도를 받고 함께 인동교회를 다녔다. 인동교회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형이 노름을 많이 하여 다르게 살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용하는 노름을 안 한다는 조건으로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서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박용하는 옥계에 조그마한 예배당을 열게 되었는데, 집안이 지역 유지이고 배운 사람이었던 터라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1927년에 옥계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당시 아들 박태희는 두 살이었다. 박용하 장로는 마을 동제사도 없애고 제사도 모두 없앴다. 그런 연유로 옥계동에서는 칠십 노인도 제사 절차를 잘 모를 정도였다. 옥계동에는 50호 정도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근방에서 마을에 샘을 파지 못하게 하여 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옥계교회가 들어서면서 박용하가 제일 먼저 샘을 팠고 그때부터 집집마다 샘을 팠다.

또 가장 먼저 상투도 잘랐으며,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미국에서 발동기를 주문한 다음 스스로 공부해서 사용 방법을 터득하여 인동에서 가장 먼저 발동기를 농사에 이용했다. 1930년경에는 정미소를 차렸는데 방아 찧으러 온 사람보다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또 자전거를 일본에서 사와서 구미 근방에서는 가장 먼저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당시 자전거를 ‘쇠말캐’라 불렀는데 선산 장천에서 ‘쇠말캐’를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

지금의 옥계교회 터는 원래 논이었다. 교회는 초가집이었는데, 지금 교회와는 달리 남녀가 유별하기 때문에 여자는 장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기도할 때는 장옷을 벗고 했는데 강단에서 길게 담을 쌓아 남녀가 서로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강단에 있는 선교사만 신도들을 볼 수 있었다. 최근까지도 옥계교회는 남녀가 자리를 따로 앉다가 1970년대 후반에 극장형으로 바뀌었다. 박태희는 경기도에서 목사로 있다가 은퇴해서 귀향하여 옥계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은퇴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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