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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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佳里洞祭 |
영어의미역 | Village-ritual Ceremony of Oga-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오가리 |
집필자 | 석대권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오가리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오가리 마을 서쪽으로 2㎞ 지점의 저전동(楮田洞) 뒷산에 옥녀봉이 있다. 옥녀가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 하여, 또는 처녀가 거문고를 타는 산세에는 다섯 가지의 아름다움[佳]을 지녔다고 하여 오가리라고 했다고 한다. 오가리 동제는 산제장과 마을 입구의 골맥이 당목 앞에서 음력 1월 3일에 마을의 무탈함을 빌며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매년 정월달이 되면 마을에 사는 학자에게 날을 받아 제를 지냈는데, 제일은 보통 초사흗날로 결정되었다.
[연원 및 변천]
오가리는 임진왜란 때 조문옥(曺文玉)이라는 사람이 피난하여 서당을 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제도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하겠지만, 다른 마을에 비해 빠른 시기인 해방 후에 끊겼다고 한다. 산제장은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으나 현재 나무 둥치만 남은 상태이며, 마을 입구에 서 있던 느티나무도 30년 전에 고사하고 말았다.
[신당/신체]
‘버무정지골’에 있는 산제장에서 산신령인 호랑이에게 지내는 제사를 먼저 지낸 후, 마을 입구에 있던 당목인 느티나무 앞에서도 제를 올렸다.
[절차]
동제 날이 잡히면 50세 이상의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기복덕을 따져 제관으로 선출하였다. 제관 이외에 그를 도와줄 사람을 2~3명 정도 더 뽑는데, 서로 상의하여 역할 분담을 한다. 이들을 따로 호칭하는 말은 없고 모두 ‘제관’이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제를 지내기 전날에 하루 동안 부정한 것을 가리며 공을 들인다. 제관은 하루에 서너 번의 목욕을 해야 하고, 제삿날 새벽에 제장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마을 입구에 금줄이 쳐지면 제를 지낼 때까지 외부인은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금줄은 제가 끝난 후 거두거나 자연스럽게 썩어 없어지도록 그냥 놔둔다.
제물은 당일 아침 제관이 장만하고, 그를 도와줄 사람 한 명이 동행한다. 저녁을 먹고 마을회관에 모여 제 지낼 준비를 한다. 자정 무렵에 제관과 그를 도와줄 한 명이 산에 먼저 올라 밥을 지은 후, “어이(워이)!”라고 고함을 질러 밥이 다 됐음을 알리면 마을에 남아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제물을 짊어지고 산에 오른다. 제물로 소고기·백설기·밥·과일 등을 진설하며 술은 막걸리를 썼다. 이 때 소고기는 생것으로 올린다.
제는 유교식으로 지냈는데 축문을 읽거나 소지를 올리지 않았다. 산제장의 제가 끝난 후 마을로 내려올 때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골맥이’ 당목 앞에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낸다. 제를 지내는 동안 마을 주민들은 대개 각자의 집에서 조용하게 있거나 마을회관에 모여서 기다린다.
동제는 산신령인 호랑이에게 지내는 제사로, 정성이 부족하면 곧 탈이 생긴다고 한다. 한번은 산제장에서 어떤 제관이 불을 피려고 부싯돌을 켰는데 불이 한 번에 붙게 되었다. 그 제관은 놀랍고 신기한 마음에 불을 끄고 다시 한 번 부싯돌을 켰는데 그 후로 다시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언제나 엄숙한 마음으로 정성들여 제를 지내야 됨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다.
[부대행사]
오가리 동제를 모두 지내고 나면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남은 제물을 음복한다. 이때 몸과 마음이 부정한 사람이 산제장에 올렸던 음식을 먹으면 욕을 본다고 하니, 그렇다고 여긴 사람은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동제 때 필요한 비용은 마을 동답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충당하는데, 그 해 제관을 맡았던 사람이 맡아서 경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