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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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牧場 |
영어공식명칭 | Official Farm in Charge of Wo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조선시대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말을 방목하기 기르기 위하여 건물, 목책 등을 설치한 장소.
[목장 설치 배경]
조선 초기에 중앙 정부는 말을 길러 국용을 조달하고 동시에 중국과 말 무역을 하였다. 전라도는 겨울철에도 춥지 않아서 목마용 풀을 얻기에 용이하였다. 이러한 기후 조건에다 제주도와 인접하여 전라도는 일찍부터 목장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특히 진도와 같이 물과 풀이 풍부한 섬과 바닷가 연안 지역은 말을 방목하기에 최적지라고 평가되었다. 15세기 전반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설치된 목장은 총 34개소이다. 지역별로 구분하면, 나주 9개소·진도 6개소·고흥 5개소·무안 3개소·해남 3개소·강진 3개소·장흥 2개소·영암 1개소·순천 1개소·영광 1개소 순이다.
[목장 초설]
해진군(海珍郡)[1409년 해남현과 진도군을 합병한 옛 고을 이름]에서는 태종 때부터 공도화된 진도에 목장 운영을 시도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 10월 “제주에서 바친 말을 진도의 고읍(古邑)[지금 진도군 고군면 외이리]에 방목하라.”라는 지시에 의하여 진도에 목장을 설치할 것을 검토하게 되었다. 따라서 1414년(태종 14) 1월 6일에 제주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윤임(尹臨)에게 제주말을 보내라 명령하였다. 이에 윤임은 제주에서 암수 말 1800 필을 골라서 15운(運)으로 나누어 진도로 보내어 방목하였다. 이어서 1414년 3월에는 지해진군사(知海珍郡事) 이각(李恪)에게 명하여 군(軍)과 민(民)을 데리고 진도의 구치(舊治)에 들어가 목장을 운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수초의 부족 등 적합지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1년만인 동년 11월에 진도 목장을 혁파하고 진도에 들어간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삼촌면[현 해남군 삼산면의 일부]으로 철수하였다.
[황원 목장]
1437년에 고군면 고성으로 환치되어 있었던 진도군이 현재의 진도읍 위치로 옮겨갔다. 이어서 1440년 무안 목포[당고지: 구 목포상고 인근]에 있던 전라처치사영(全羅處置使營)이 현재 우수영으로 옮겨 오면서 서남해안의 방어체제가 곤고해지자 해남과 진도의 목장 운영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445년(세종 27) 충청·전라·경상도 도순찰사 김종서(金宗瑞)의 복명에 따라 진도의 3곳과 해남 황원[화원반도] 등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1445년에 말 4,000필을 방목할 수 있는 황원곶에 목장을 설치하고 영암군사가 관리하였다. 성종 무렵에는 1,500여 필을 방목하였으며, 중종 때는 노화도와 소안도에서 방목하던 말까지 옮겨 왔다. 1454년(단종 2) 6월에는 황산면 송호리에 목장성을 축성하였으며, 17세기 무렵에는 진도의 감목관이 해남군 화원면 청룡리에 설치되어 진도목장까지 관할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남 지역의 화원반도는 높은 산이 없어 목장의 설치가 용이하였으며, 진도군과 인접하여 지산면의 목장까지 관리하는 감목관이 해남에 설치되었다. 이는 섬에 설치된 목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사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