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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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영어음역 | Uibyeong Undong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1895년에서 1911년 사이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을미년[1895년] 말의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한 이래 1905년(고종 42)의 을사의병, 1907년(순종 1)의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제천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을미 의병의 활동]
1895년(고종 32)에 있었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과 연말에 발표된 친일 내각의 단발령은 조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국민적 분노를 샀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서사(長潭書社)에서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 의병을 일으키거나 망명 혹은 자결을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두고 치열한 논의가 벌어졌다.
제천 군수가 단발을 재촉하던 1896년(고종 33) 1월 중순, 지평의 포군들로 이루어진 의병 부대가 제천으로 달려왔다. 이에 장담의 선비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했고, 그 해 1월 22일 의진은 장담 출신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내세워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2월 7일에는 인근 지역의 포군들이 대거 합류하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면목을 새롭게 했다. 이 부대는 이후 호좌의진(湖左義陣)이라 일컫게 되는데, 제천 의병은 이 호좌의진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쳐서 싸우게 된다.
제천 의병은 친일적인 관료들을 처단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충주성까지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충청남도 지역과 영남 쪽으로는 이범직(李範稷)과 서상렬(徐相烈) 같은 명망 있는 이들을 파견하여 연대를 도모했는데, 특히 영남에 간 서상렬은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을 결속하고 태봉 전투를 감행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호좌의진은 일본군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주변의 열 개 남짓한 고을을 해방구로 만들고 기세를 올렸고, 이에 다른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들도 제천으로 달려왔다. 대규모 연합 의진의 진용을 갖춘 호좌의진은 수안보와 가흥의 일제 병참 기지를 수차례 공격하며 명성을 떨쳤다.
한편, 정부는 아관파천과 친일 내각 수립을 계기로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였고, 마침내 5월 25일 관군이 제천으로 쳐들어 왔다. 호좌의진은 관군을 물리쳤으나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치러진 남산 전투에서 패하면서 제천을 빼앗기고 말았다.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安承禹)는 의를 부르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제천을 잃은 유인석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 지역을 전전하다가 서북 지역에서 재기하기 위해 마침내 서행(西行) 길에 올랐지만, 결국 압록강을 건너가서는 의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인석은 해외에서 새로운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에 들어와 의병 봉기를 측면 지원하였다.
[을사·정미 의병의 활동]
1896년의 아관파천 이후 여러 이권이 열강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은 러일 전쟁을 통해 한국에서의 간섭을 본격화하여, 한일 의정서와 한일 협정서를 통해 이권을 확대하고 고문정치를 제도화했다. 나아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저항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1907년(순종 1)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해 버렸다. 이제 조선의 멸망은 막을 수 없는 대세인 듯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여름 이후 맨 먼저 봉기한 것이 원용팔(元容八)과 정운경(鄭雲慶)이었다. 모두 을미의병 당시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던 그들이 봉기하자 옛 동지들이 속속 합류했으나 원주 진위대(鎭衛隊)에 의해 원용팔과 정운경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의 봉기는 구체적 성과는 적었으나 을미의병 당시 의병론자들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은 본격적인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던 해산 군인, 전통적인 의병론자들이 원주의 해산 군인들이 제공하는 신무기를 얻어 봉기했다. 같은 해 8월 15일, 그들은 제천에서 진압하러 달려온 일본군과 천남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승리한 여러 의진은 연대를 통해 전형적인 유격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항일전을 수행했다. 그것은 전통 문화 수호라는 면이 강했던 전기 의병과 달리 국가의 멸망을 가로막으려는 장엄한 행렬이었다. 전기 의병기에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던 이강년(李康秊)은 전통의 호좌의진을 재건하였다.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일대의 산악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활발한 의병 활동을 벌였고,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의 서울 진공 작전 때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 여름, 청풍 금수산에서 이강년이 일본군 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면서 호좌의진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강년의 뒤를 이어 김상태(金尙台)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1911년 9월 21일 끝내 일제에 붙잡혀 옥사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제천 지역에서는 개항기 내내 끊임없이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봉기가 유인석의 경우에서 보듯이 나라 밖에 저항의 기지를 건설하는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이러한 모색들은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노선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