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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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左義陣 |
영어음역 | Hojwauijin |
영어의미역 | Hojwa Righteous Army Camp |
이칭/별칭 | 제천의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구한말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 조직.
[개설]
호좌의진은 단발령 이듬해인 1896년 초에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조직된 의병 조직이다.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의 포군이 주축이 되었으며 제천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제천 의병이라고도 한다.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고, 제천을 비롯한 충청북도·강원도 영서 지역의 열 개 남짓한 고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며, 영남·충청남도 지역까지 소모부대를 파견하여 의병 봉기를 독려하고 친일적인 지방관들을 베었다. 1896년 5월 관군을 앞세운 일본군에게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유인석을 비롯한 핵심 지도자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호좌의진의 출범]
1895년 단발령이 내릴 무렵 제천 지역에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善)이 이끄는 의병 부대와 젊은 선비들이 연합하여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내세운 제천의진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진은 지평 출신의 포군들이 지평 군수 맹영재의 사주로 이탈하기 시작하며 급속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위기에 처한 의병대는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새로이 의병대를 구성했으며, ‘호좌의진’이라 이름하였다.
[호좌의진의 활동]
호좌의진은 일제에 대항하기를 머뭇거리는 의성 군수와 예천 군수의 목을 베고, 천안 군수까지도 죄를 물어 죽이는 등 흔히 ‘3관찰 6군수’를 벤 활동으로 일컬어지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좌의진의 이와 같은 비타협적인 투쟁 노선은 친일 관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충주관찰부를 점령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이러한 호좌의진의 명성을 듣고 제천으로 모였다. 호좌의진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던 대규모 연합 의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관파천과 친일 내각 수립을 계기로 한 정부의 계속되는 의병 해산 촉구에 대부분의 의진들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좌의진은 해산을 거부하며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계속된 몇 차례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기도 했으나, 악천후와 경험 부족으로 인해 남산 전투에서 패하며 제천을 빼앗기게 되면서 그 세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어 유인석이 서북 지역에서 재기하기 위해 서행 길에 올랐으나, 서북 지역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호좌의진을 해산하게 되었다.
한편, 1907년 여름에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봉기한 이강년 부대도 호좌의진을 자처했다. 유인석의 휘하에서 유격장으로 종군했던 그는 옛 호좌의진의 인맥을 활용하면서 충청도와 경상북도 북부, 강원도 영서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한때는 가평 화악산 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단발령 이후로부터 군대 해산 이후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부대 이름을 내걸고 싸운 드문 경우이다. 대외적으로는 유인석의 경우에서처럼 국외에서 항일 운동의 기지를 건설하는 쪽으로 나아갔고, 안으로는 강한 결집력을 가진 화서학파가 주도하였기 때문에 다소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