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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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運動 |
영어음역 | Minjok Undong |
영어의미역 | Racia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전개되었거나 제천 지역 출신자가 전개한 민족 해방 운동.
[개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제천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민족 운동들이 일어났다. 비타협적 무장 투쟁 노선의 원류가 된 의병을 비롯하여 3·1 운동이 일어났으며 학생 운동, 청년 운동 등의 사회 운동과 교육 운동도 일어났다.
[3·1 운동과 국내 활동]
3·1 운동은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이범우(李範雨)가 서울에서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범우는 최린으로부터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내려오면서 횡성과 원주의 지인들에게 운동 참여를 권유했으며, 제천으로 돌아와 부명학교 후배인 장두성과 차은성을 단양과 영월로 보내어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였다.
제천에서의 만세 운동은 4월 17일 제천 장날에 거행하기로 계획되었으나 태극기를 만들던 장용근 등이 체포되는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범우와 권종필(權鍾弼)·이기하(李起夏)·전필현(全弼鉉) 등의 주도로 제천 장날에 예정대로 전개되었으며 부명학교 학생과 상인, 농민 등 다수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당일 수비대가 출동하여 사격하는 바람에 이맹삼(李孟三), 이화춘(李化春), 이윤용(李允容), 박성일(朴聖日) 등이 사망하고, 다친 사람도 많았으며, 체포된 자들 다수가 체형(體刑)을 받았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임시 정부와 관련하여 국내에서 독립군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한 것으로 짐작되는 권명상(權命相)이나 이주면(李柱冕)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또한 3·1 운동 이후 제천에서는 맹휴 투쟁, 농민 운동, 또는 형평 운동, 청년 운동, 문화 운동 등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들 운동은 대체로 구한말 이후에 시작된 신교육 운동, 또는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고 여러 운동 단체는 상호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예컨대, 청년 운동을 주도한 김정호는 1927년에 결성된 농민조합 간부였으며, 사회주의적 이념 선전의 성격을 띤 연극 운동을 주도했던 박육경은 맹휴 투쟁의 주모자였고 좌파 조직이라 하여 일제의 중요한 감시 대상이던 제천소년회와 제천청년회를 이끌던 간부였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1920년대에 유행하던 사회 운동은 점차 쇠퇴하고 관변적 성격을 가진 강습회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제천 지역 출신의 국외에서의 민족 운동은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 중심의 운동과 무장 투쟁 중심의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국외로 망명하고 결국은 하와이에서 활동한 김진목(金鎭睦)의 경우가 전자에 해당하고, 의병 운동에 가담했던 채찬(蔡燦)이나 이명하(李命夏) 등의 국외 활동이 후자에 해당한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채찬은 서로군정서, 통의부 등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독립단을 조직한 이명하도 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 외에 백두산 일대의 만주 지역을 무대로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신응규(申應奎), 무정부주의 운동 계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에서 활약한 이용준(李容俊),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한 이성구(李晟九), 그리고 임시 정부와 신민부에서 활동한 황학수(黃鶴秀) 등도 있었다. 황학수는 후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시안[西安]에서 총사령 대리로서 활약하였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본격화된 민족 운동은 1920년대 말까지 활발히 전개되었고, 이후의 민족 운동은 국외에서 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