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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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川黃江影堂-遂庵祠 |
영어음역 | Hwanggangyeongdang Mit Suamsa |
영어의미역 | Hwnggangyeongdang and Suam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형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7년 12월 7일 - 제천 황강영당 및 수암사 충청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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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제천 황강영당 및 수암사 충청북도 기념물 재지정 |
건립 시기/일시 | 1726년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27년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72년 |
이전 시기/일시 | 1983년 |
현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3 |
원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 112 |
성격 | 영당|사당 |
양식 | 팔작지붕[황강영당]|맞배지붕[수암사] |
정면 칸수 | 2칸[황강영당]|3칸[수암사] |
측면 칸수 | 2칸[황강영당]|2칸[수암사] |
소유자 | 사유 |
관리자 | 권성중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기념물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영당과 사당.
[개설]
황강영당(黃江影堂)은 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권욱(權煜)·윤봉구(尹鳳九) 등 이른바 5현(賢)의 영정을 배향하고 있으며, 수암사(遂庵祠)는 수암(遂庵) 권상하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위치]
제천시 수산면 소재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난 국도 36호선을 따라 약 16㎞ 가면 탄지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난 지방도 597호선을 따라 약 2㎞ 가서 송계3교를 건너면 길 오른쪽에 제천 황강영당 및 수암사가 위치하고 있다.
[변천]
황강서원은 1726년(영조 2)에 건립하고 다음해에 사액을 받았다. 원래 황강서원은 권상하의 거주 공간인 한수재에 소재한 것이 아니라 한수재로부터 황강 상류 지역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한수재의 서재로 사용하던 현재의 건물에 영정을 봉안하면서 황강영당이라 하였다.
이후 1950년 6·25 전쟁 당시 국군이 사단 본부로 사용하였고 마루, 문짝 등을 다 뜯어서 땔감으로 쓰면서 건물이 파괴되었다. 1972년 대홍수 때는 그나마 남아 있던 서책·가구 등의 유산도 유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정은 모시고 나갔기 때문에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1977년 12월 7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천 황강영당 및 수암사는 본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 112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 지구로 편입되면서 1983년 현재의 위치인 송계리로 이건하였다.
[형태]
황강영당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처마 밑에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한수재(寒水齋)’와 ‘황강영당(黃江影堂)’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수암사는 재실 뒤편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설치하였다. 건물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가구 형식은 3량가의 납도리집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 창호는 각 칸마다 사분합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현황]
현재의 제천 황강영당 및 수암사 일곽은 전체적으로 산등성이의 완경사지에 동향하여 배치하고 있다. 일곽은 재실인 한수재를 중심으로 북쪽에 영당, 서쪽에 사당의 영역이 각기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영당 영역은 황강영당을 중심으로 입구의 오른편 뜰에 권상하가 1797년에 황강서원에 세웠던 묘정비와 ‘수암선생구택지비(遂庵先生舊宅之碑)’가 있다. ‘수암선생구택지비’는 옥소 권섭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수암의 집에 세워진[1727년] 것을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한수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재실은 원래 수암이 거주했던 거주 공간이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5칸 반으로 되어 있으나 남측은 정면 1칸 반, 측면 7칸, 북측은 정면 1칸, 측면 6칸의 익랑을 두어 H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좌우 익랑을 제외하면 몸체는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우 익랑은 대칭을 취하지 않고 남측 부분은 팔작지붕, 북측 부분은 우진각지붕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은 가운데 6칸 크기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북측으로 2칸 크기의 방 2개와 방 양측에 부엌이 있으며 남측으로 4칸 크기의 방과 부엌·큰방, 서측에 작은 방과 부엌,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 구조는 정면 가운데 대청마루 부분만 장대석 기단으로 하고 나머지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가구 형식은 몸체와 남측 익랑은 종도리와 중도리, 그리고 처마도리로 짜여진 5량가의 가구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측 익랑은 종도리와 처마도리로 짜여진 3량가의 가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가구 형식으로 인해 몸체와 남측 익랑의 지붕보다 북측 익랑의 지붕이 낮아지게 되었다.
사당 영역은 재실인 한수재 뒤편 상당히 높은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사당인 수암사를 중심으로 남측에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장판고가 북향하고 있다. 장판고는 본래 판각을 소장한 곳으로 1950년 6·25 전쟁으로 멸실되기 전에는 먹을 갈아서 탑본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는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정치사적 영향에 따라 서원으로 사액까지 받았으나 영당으로 바뀌게 된 사례로서, 서원 철폐령 이후 서원 건축의 잔존 양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