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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1398
한자 建築
영어음역 Geonchuk
영어의미역 Architectur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금열

[정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예술, 또는 기술이 낳은 구축물.

[개설]

건축(建築)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전통 건축은 동양 사상으로 집 우(宇)와 집 주(宙)의 우주관으로 성주괴멸(成住壞滅)하는 자연관의 결정체이다. 전통 건축은 시공간적으로 빈 공간의 허(虛)에서 우주와 합일하는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가 충만한 건축물을 추구하였다.

현대 건축은 물질, 시간, 공간, 조경 등을 복합적으로 설계하여 건축물을 양산하면서 전통 건축을 흉내 낸 기와 건물과 자연과 부조화로 동일한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면서 전통 건축의 가치관이 반감되었다. 제천 지역에 산재한 건축의 변천 양상은 다른 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건물을 안치한 자연의 형승이 다르기 때문에 건축물의 구조도 상이할 수밖에 없다.

[선사 시대의 건축]

선사 시대 선사인은 자연적으로 형성한 천연 동굴을 찾아서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대표적으로 석회암으로 형성된 점말 동굴을 들 수 있다. 점말 동굴은 입구에 사립문만 달면 훌륭한 주거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동굴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벗어나 비옥한 강변으로 이동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사기리 창내 유적을 보면 어족 자원이 풍부한 제천시 한수면 사기리[현 충주시 동량면] 강변에 통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우고 띠로 덮고 출입구를 만들었던 낟가리 형상은 김치광의 모습과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당대 최상의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 시대 청풍강 주변에 농경 생활이 정착되면서 선사인의 주거 흔적으로 제천시 청풍면 광의리 네모꼴 집터 2기, 계산리 원형 집터 3기, 양평리 원형 집터 1기, 수산면 능강리 원형 집터 3기가 발굴되었다. 대부분 반지하식 움집에서 강돌을 원형으로 두른 화덕에 불을 피우며 정착 생활한 것으로 확인된다. 청풍강 주변은 북서 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출입구는 남동쪽으로 설치하고, 강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이용한 샘터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집돼지 뼈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집 근처에 통나무 띠집으로 만든 돼지우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천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 상당수가 청풍강 주변[제천시 청풍면 광의리 1기, 방흥리 1기, 황석리 46기, 진목리 8기, 계산리 3기, 양평리 2기, 능강리 2기, 한수면 호운리[현 충주시 동량면 호운리] 1기, 함암리[현 충주시 동량면 함암리] 8기, 신월동 1기, 덕산면 성암리 1기, 금성면 구룡리 3기, 봉양읍 명도리 1기, 학산리 1기, 왕암동 2기, 송학면 도화리 광암마을 1기, 입석리 1기]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은 대단위 움집 주거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건축]

제천 지역에서 역사 시대 전후의 건축물은 보고된 바 없으나 청풍강 주변[제천시 청풍면 양평리·도화리·읍상리·읍하리 신담·교리]에서 대규모의 적석총이 발견되었으며, 고구려 고분으로 계산리 3기, 황석리 4기, 연곡리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삼국 시대에 조성된 고분들이 제천시 고암동 20기, 모산동 수십여 기, 왕암동천남동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제천 지역에는 당연히 주거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의림지 주변에 삼국 시대 고분군이 대단위로 밀집된 것은 의림지를 중심으로 한 도작문화(稻作文化)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제천 지역에 있었던 삼국 시대 건축물 양식은 내제군[제천]이 한때 적산현[단양]과 사열이현[청풍]을 속현으로 두었던 것을 감안하면, 단양에서 발굴한 대단위 취락 지역의 건물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청동기 시대 움집에서 지상 가옥으로 변천하는 발전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주거지 외에 제천 지역은 청풍강변에 고대 성곽이 대거 분포하는 지역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제천 인근 지역인 봉산성[단양]과 괴곡성[수산면 괴곡리 비정]이 기록된 신라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기록되어 있듯, 제천 지역은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다.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는 성열성에서는 성안에 건축물을 축조한 흔적으로 주초석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이와 함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이궁으로 전승하는 터도 있다.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 동경저 터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어 건물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지만, 부지 면적의 지세로 보아서 행궁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제천 지역에서는 불교 건축도 시작되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죽령과 계립령으로 불교 문화를 전파하였고 그 결과 제천 지역에도 사찰이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월광사지, 장락동장락사지, 청풍면 읍상리에 평등사지 등이 이 시기의 사찰이다. 대표적으로 장락사지의 규모와 가람 배치를 보면 5차에 걸쳐 중창한 건물로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34개동의 건물지, 담장 4개소, 답도 3개소 등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치미의 수막새와 사람 얼굴을 새긴 인면와(人面瓦), 화려하고 정교한 연화문과 당초문 등의 유물에서 대가람을 웅장하게 장식한 불교 건축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다. 특히 냇물을 끼고 있는 점에서 호법룡(護法龍)과 관련한 배치로 보인다.

또한 제천 점말동굴의 주변에서 탄생불(誕生佛)이 출토되었는데, 동굴의 석회암 병풍석 암벽 윗면에 법당의 들보를 박았던 구멍이 발견되어 불교 의례에 활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옛 선사 시대의 주거지가 신성한 예배 장소로서 변화되어 재활용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이한 예로서 주목된다.

[고려 시대의 건축]

고려 시대 제천 지역은 제주(堤州)[제천]와 청풍의 치소를 중심으로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또한 향(鄕)·소(所)·부곡(部曲)·처(處) 등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지역은 상당히 인구 밀도가 높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이 시기 축조된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그 모습을 고려 건국 무렵 제주의 치소가 한시적으로 이전된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봉양읍 장평리의 관아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상당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또한 현재는 수몰된 청풍의 남산 자락에서 기와 조각이 대거 발견된 바 있다. 더불어 제천시 왕암동 지역에는 기와를 굽던 가마터와 기와 조각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로써 당시 주택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기와지붕을 얹은 대규모의 관아를 비롯한 주택이 건립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서민 주택은 초가집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의 건축]

1. 관아의 공해(公廨)

조선 시대 제천 관아는 주산인 아후봉을 ‘배산(背山)’으로 삼고 동헌에 연당(蓮塘)을 조성하여 ‘임수(臨水)’로 삼았다. 그리고 남당 주변에는 소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하였다. 제천 관아는 1766년, 1809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일부 소실되었고, 일본군과 관군이 1907년 의병을 제압한 후에 징계의 본보기로 전시가지에 불을 지르면서 전소되었다.

1872년 『제천현지도』를 보면, 1) 향교(鄕校), 2) 명륜당(明倫堂), 3) 풍화루(風化樓), 4) 헌공청(憲公廳), 5) 형청(刑廳), 6) 읍창(邑倉), 7) 한문루(閑門樓), 8) 동헌삼문(東軒三門), 9) 동헌(東軒), 10) 책방(策房), 11) 내아(內衙), 12) 외삼문(外三門), 13) 내삼문(內三門), 14) 객사(客舍), 15) 사령청(使令廳), 16) 현사(縣舍), 17) 작청(作廳), 18) 향청(鄕廳), 19) 장청(將廳), 20) 훈련청(訓練廳), 21) 화약고(火藥庫), 22) 사직단(社稷壇) 등이 배치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오늘날 제천향교만 복원하였다.

청풍 관아의 관문인 남덕문(覽德門)의 제천 청풍 팔영루(八詠樓)는 누관의 8경승과 『주역(周易)』의 낙서(洛書)에서 8방위를 상징하며, 제천 청풍 금남루(錦南樓)는 아사삼문(衙舍三門)으로 ‘청풍선부(淸風仙府)’의 현액을 내걸었으며, 외삼문과 내삼문을 들어서면 아사(衙舍)가 있었다. 청풍강 가에 ‘소주연침응청향(蘇州燕寢凝淸香)’의 시구에서 따와 이름 붙인 응청각(凝淸閣)이 있었다. 이 건물은 누각의 양식으로 1층에 창고와 부엌을 갖추고 있었으며, 2층은 온돌방의 구조로 겹창문을 내어 강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제천 청풍 한벽루응청각 사이에 명월정(明月亭)이 있었으며, 이후 달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언덕으로 이건했다. 명월정 터에 동헌인 관수당(觀水堂)을 축조하였는데, 온돌방에 거실이 붙은 12칸으로 서헌인 매월헌(梅月軒)을 배치하여 실용성을 추구했다. 청풍관(淸風館)의 객관은 대청에 전패(殿牌)를 봉안한 다용도실의 구조로 건축하였다. 청풍강 가에는 이외에도 성리학의 명소인 소연재(翛然齋), 율려와 관련된 이름을 가진 청음정(淸音亭), 푸른 노을이 으뜸인 창하정(蒼霞亭), 강 물결에 비추는 영파루(映波樓) 등이 있었다.

또한 관아와 관련된 창고 시설도 건립되었다. 청풍 관아의 군기고(軍器庫)를 비롯하여, 청풍강의 수운이 발달하면서 관창(官倉)으로 읍창(邑倉), 남창(南倉), 북창(北倉), 서창(西倉)이 건립되었다. 청풍 관아의 사우(祠宇)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대성전(大成殿)과 좌우에 동·서양무(東·西兩廡)와 명륜당을 갖춘 청풍향교가 존재하였으며, 아울러 봉강서원, 황강서원과 열락재(悅樂齋) 등이 있었다.

청풍 지역은 산림 지대로 목재가 풍부하고, 청풍지(淸風紙)와 덕산지(德山紙)에서 한지를 생산하였으며, 전통 기와를 굽는 기와 공장이 있었고, 도색하는 옻칠 공장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건축 자재를 현지에 조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옛 청풍부의 터전은 오늘날 수몰 지역으로 포함되어 버렸다. 관아의 건물은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었다. 객관으로 사용하던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34호 청풍 금병헌, 고관대작이 숙식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90호 제천 청풍 응청각,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의 삼문으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20호 제천 청풍 금남루, 청풍관의 관문으로 남덕문으로 별칭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35호 제천 청풍 팔영루, 청풍도호부 관학 기관으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64호 제천 청풍향교, 호서 제일의 누관으로 보물 제528호 제천 청풍 한벽루 등을 이전하여 관아의 건축미를 유감없이 잘 보여준다.

2. 누정과 조경

조선 시대 사군(四郡)으로 불리는 제천·청풍·단양·영춘은 산자수려하여 고관대작이 유람하며 머물었던 누정이 산재하였다.

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제528호]의 창건은 주열(朱悅)[?~1287]의 제영에서 보듯이 1287년 이전에 사찰에 딸린 정자였으나 청풍 태생의 청공(淸恭)[1251~1322]이 충숙왕(忠肅王)의 왕사(王師)가 되면서 청풍군으로 승격되고, 제천 청풍 한벽루도 중층 누각으로 중건되었다. 제천 청풍 한벽루는 덤벙주초에 정면 4칸에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익랑이 달린 단아한 외관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호서 제일의 누관이다.

제천은 고원 분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어디를 파도 샘물이 솟구친다. 그래서 제언 문화가 발전하였고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경승의 의림지 호반에 누정을 도처에 세웠다. 현재 의림지 호반에 남아 있는 누정은 경호루(鏡湖樓), 영호정(暎湖亭), 우륵정(于勒亭)이다. 선현들이 아취를 즐기며 사라진 정자들은 대송정(大松亭), 진섭헌(振屧軒), 후선각(候仙閣), 임소정(臨沼亭), 청폭정(聽瀑亭), 망폭정(望瀑亭), 호월정(湖月亭), 홍류정(紅流亭), 의림정(義林亭) 등이다. 그리고 현청의 관아에 읍평루(挹平樓)와 객사의 남쪽에 의천루(義泉樓), 제천향교에 풍화루(風化樓), 남당서원 남당(南塘)에 군자루(君子樓)는 등도 건립되었다. 이외 제천 근교 경승지에 어약정(魚躍亭)과 탁사정(濯斯亭)[봉양읍], 관란정(觀瀾亭)[송학면], 송석정(松石亭)[봉양읍 구학리] 등이 있었다.

제천의 대표적인 조경으로,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 112번지권상하(權尙夏)가 살았던 한수재를 들 수 있다. 한수재는 공(工)자형의 구조에 몸체 3칸은 대청마루에, 양측은 익랑의 구조로 좌측 익랑은 7칸, 우측 익랑은 6칸의 팔작 지붕 집이다. 1983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로 이전하였고,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한수재는 1950년 6·25 전쟁 시 국군이 사단 본부로 사용하면서 마루와 문짝 등을 다 뜯어서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파괴되고, 1972년 대홍수 때 일부 유물이 유실되면서 원형을 상실하였다.

「한수재 벽서 율실기」에 보면, 한수재의 벽면에 탁본과 벽화로 장식하고, 중간도리에 현액을 내걸고, 남쪽 계단 아래 위에 목단 4떨기, 작약 2떨기, 정향(丁香) 2그루, 흰 복숭아 2그루, 측면에 버드나무 1그루를 심고 괴석 2개와 돌, 질그릇 화분을 조성하고, 담장의 모서리에 밖에는 누른빛의 장미 1떨기, 노거수 매화 1그루 등을 조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명성황후 월악궁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한송초등학교의 교정에 있는 주춧돌은 조선 말기 명성황후 별궁(別宮)의 것으로 1892~1894년에 완공하였지만 그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면서 궁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1920년 궁궐을 헐은 재목으로 한수초등학교와 면사무소를 짓고, 옛 충주군청의 별관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 나머지는 1944년 송계초등학교를 짓는 데 사용하고, 북문(北門)의 종루(鐘樓)와 초루(譙樓)는 해체하여 지서(支署)를 건축하고, 1943년 송계초등학교의 교사를 신축한 것으로 전한다. 명성황후 별궁지에 송계초등학교를 건립하면서 주춧돌 수십 기가 땅속에 매립되었다고 하며, 주춧돌이 현재 운동장 남쪽에 남아 있다.

[현대의 건축]

1941년 제천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이후 1957년 3월 8일 중앙시장은 목조(木造) 와즙(瓦葺) 아연(亞鉛) 2층으로 205점포[9,854.5㎡]가 세워졌으며, 1955년 3월 30일 서부시장은 목조 와즙 평가(平家) 가옥으로 191점포[1,071㎡]가 들어섰다. 1959년 8월 1일에 단층 목조 와즙으로 110점포[3,623㎡]를 갖춘 역전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일부는 1962년에 대화재로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어 현재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1983년 제천시 청풍면에 있던 8개 마을에 58개의 민가를 실측 조사하여 충주댐이 수몰되기 이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산을 등지면서 남향과 동남향으로 배치하고 안채는 일자형이 일부 있지만 주로 ㄱ자형이다. 안채 전면으로 대문을 포함하여 부속사를 배치하였는데, 안채가 一자형인 경우 부속사는 ㄱ자형으로, 안채가 ㄱ자형인 경우 부속사는 一자형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헛간과 변소는 안채의 부엌과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가옥은 안채와 행랑채로 구획하며, 부속 건물로 우사, 돈사, 방앗간, 헛간, 창고, 우진각 솟을지붕 건조실, 잠실 등을 배치하였다. 대개 집안에 장독대를 두었으며 샘물은 공동 우물로 사용하였다. 가옥의 구조는 안방, 윗방, 건넛방, 건넛방마루, 사랑방, 대청마루, 대청마루의 후보(後補)에 제사방, 툇마루, 누다락, 광, 부엌, 함실과 누마루 등으로 구분된다.

가옥의 지붕은 둥근기둥과 각기둥으로 벽체는 싸리졸대에 흙벽치기와 흙벽돌로 마감하면서 흙바름과 회바름으로 바르기도 하였는데, 시멘트 블록으로 쌓기도 하였다. 또는 부엌의 외벽은 흙을 모르타르로 막돌을 바른층 쌓기 또는 판자벽으로 마감하기도 하였다. 가옥의 지붕은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골함석우진각지붕으로 개조하거나 전통 한식기와는 팔작 기와지붕으로, 양기와는 우진각지붕·팔작 기와지붕이 많았다. 특이한 구조로 흙마루와 욕실은 한집이 있었으며, 둥근 통나무에 흙 바름으로 마감하거나 부엌의 처마 끝에 활주를 세워서 지붕을 잇기도 하였다.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에는 옛 기와집 2가구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가옥은 보릿짚과 산풀을 베어다가 지붕을 덮었으며, 신문지(新聞紙)를 도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거의 활석이 잘게 부서진 매흙을 파다가 물에 타서 칠하다가 마분지가 나오면서 외벽에만 매질하였다.

1950년대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 전통 기와 공장에서 생산한 전통 기와를 잇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20여 가구가 초가지붕을 양기와로 교체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초가지붕은 슬레이트 지붕과 양기와로 교체하면서 초가집은 한두 집에 불과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방안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도회지와 같은 방안의 구조로 변천하였다. 현대의 건축물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사용되던 무근 콘크리트 방식이 철근 콘크리트 방식으로 전환되는 등 건축 기술이 발달하면서 초고층 아파트를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2009년 현재 제천시의 인구는 13만 6966명으로 5만 4485가구에 주택은 5만 2673가구[단독 주택 2만 5225호, 다가구 주택 6,364호, 아파트 2만 3179호, 연립주택 1,910호, 다세대 주택 261호, 비주거용 건물 내 주택 1,098호]로 주택 보급률은 96.7%이다. 주택 선호도는 단독 주택보다 공동 주택의 선호로 인하여 아파트 등 공동 주택의 건설이 증가하고 있다. 건축 허가에 있어서 철근 콘크리트, 철골, 조적, 철골 철근, 목재 등 가운데 철골 구조가 증가하고 있다.

[제천의 유형 문화재와 등록 문화재의 건물]

지방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제천의 민가로 제천 도화리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3호], 제천 황석리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4호], 제천 후산리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5호], 제천 중전리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6호], 제천 김세균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8호], 제천 지곡리 고가[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9호] 등이 있고,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제천 명오리 고가[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5호], 제원 박도수 가옥[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37호], 제원 정원태 가옥[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48호] 등이 있다. 등록 문화재로 대한통운 제천영업소[국가등록문화재 제56호],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국가등록문화재 제65호], 제천엽연초수납 취급소[국가등록문화재 제273호]가 있는데 근대 절충 양식으로 목조가구식에 함석지붕으로 내·외벽은 시멘트로 마감하고 천장은 왕대공트러스이며 바닥은 시멘트모르타르와 마루를 겸했다.

이밖에 제천 지역에서 오래된 건물로 제천시 모산동 278번지 1호에 1914년 건립하여 개조한 옛 토지개량조합, 제천역 구내에 1941년 준공한 제천기관차사무소검수고, 제천시 명동 4번지 16호에 1942년 건립한 조흥은행[신한은행]이 있다. 제천에서 가장 오래된 송학역사(松鶴驛舍)는 1949년 11월 15일 제천역송학역 간에 9.8㎞를 개통하면서 준공한 건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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