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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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喜朝 |
영어음역 | Yi Huijo |
이칭/별칭 | 동보(同甫),지촌(芝村),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양식 |
[정의]
청풍 부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시호는 문간(文簡).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다.
[활동 사항]
이희조(李喜朝)[1655~1724]는 허적(許積)이 권세를 잡고 송준길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을 때 조정에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혼자 김수항(金壽恒)에게 글을 보내 논박하여 김수항을 탄복케 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이 귀양을 간 뒤 양주의 지동(芝洞)에 칩거하면서 「대귀설(大歸說)」을 지었다.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83년(숙종 9) 다시 천거되어 전설 별검(典設別檢)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진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뒤에 인천 현감(仁川縣監)에 임명되었고, 이후 동궁 서연관(東宮書筵官)·사헌부 지평(持平)·천안 군수·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1703년(숙종 29) 청풍 부사가 되었다. 1718년(숙종 44) 이조 참판을 거쳐 1719년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는데, 철산(鐵山)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도중에 정주(定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진 교육에 힘쓰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학문과 저술]
송시열의 문인이며, 저서로 『지촌집(芝村集)』, 『우서절요(尤書節要)』, 『주륙동이집람(朱陸同異輯覽)』, 『송원명서절요(宋元明書節要)』, 『오선생서절요(五先生書節要)』,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 『동현주의(東賢奏議)』,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과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