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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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讓 |
영어음역 | Gim Siyang |
이칭/별칭 | 시언(時言),자중(子中),하담(荷潭),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제천으로 이거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할아버지는 영상공 김석(金錫)이고, 아버지는 비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부인은 제천 이대수(李大遂)의 딸 경주 이씨이다. 장인 이대수는 제천의 사족(士族)이었다.
[활동 사항]
김시양(金時讓)[1581~1643]은 처가가 있는 제천으로 이거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다. 1607년(선조 4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1609년(광해군 1)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다. 그러나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문제 되어,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626년(인조 4) 경상도 관찰사, 1631년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후금과의 화의를 끊으려는 사신을 붙잡아 두고 상소를 올렸다가 영월에 유배되었다. 복직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혔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시 가금면 하담리로 내려갔다.
[학문과 저술]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저술로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부계기문(涪溪記聞)』, 『하담잡기(荷潭雜記)』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충익공하담선생유고(忠翼公荷潭先生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함경북도 회령군 소재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는 1670년(현종 11) 조경이 찬하고 이정형이 쓴 신도비가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