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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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岩里- |
영어음역 | Hamam-ri Dokbawi |
영어의미역 | Dok Stone of Hamam-ri |
이칭/별칭 | 「독바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명환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함암리[현 충주시 동량면]의 독바위와 충주시 살미면 문화리의 공암과 용수꾸리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함암리 독바위」는 이여송(李如松)[1549~1598]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게 지맥을 끊으려고 혈을 찔렀을 때에 만들어졌다는 공암(孔岩)[구마바위]과 굴에서 뛰쳐나온 용마가 빠져 죽은 늪을 용수꾸리라고 한다는 암석유래담이자 용마전설이다. 또한 바위에 남아 있는 말굽자국은 용마가 뛰면서 남긴 발자국이며, 그때 일어난 먼지가 문화리에 자욱하였으므로 그곳을 ‘문지(文旨)’, ‘먼지’ 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한수면 함암리[현 충주시 동량면] 마을에서 얼마 안 떨어진 남한강 강변에 ‘독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남한강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있는 웅장한 이 바위 위에는 말굽 모양의 자국이 여러 개 있다. 또한 독바위에서 강 건너 마주 보이는 충주시 살미면 문화리 강변과 크고 작은 산이 뻗어 내려오는 끝 봉우리가 만나는 곳에 구멍 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공암이라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82년 충청북도에서 발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다. 또한 1999년 한국국악협회 제천시지부에서 간행한 『전설지』와 2004년 제천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제천시지』 등에도 이를 참고하여 동일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들 문헌에는 모두 「독바위」로 되어 있다.
[내용]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물밀 듯 쳐들어오자, 명나라에서는 이여송을 장수로 한 원군을 보내왔다. 이여송은 왜군과 싸우는 한편,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각 곳의 산수를 보아 인물이 날만한 곳이면 지세의 맥을 끊어 놓곤 하였다. 마침 이 마을을 지나던 이여송은 남한강변의 지세의 수려함과 하늘을 찌를 듯한 정기가 필시 큰 인물을 낳게 할 곳이라 여기고 혈을 찾아 맥을 끊도록 했다. 그때 혈을 찔린 곳이 바로 공암이다.
그런데 혈을 찔리자 굴에서 흰 용마가 뛰쳐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살미면 문화리에 있는 늪에 빠져 죽었는데, 그 늪을 ‘용수꾸리’라 한다. 용마는 큰 인물이 나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혈이 끊겨 인물이 나오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분함을 못 이겨 죽어 버린 것이다.
독바위에 남아 있는 말굽자국은 용마가 뛰면서 남긴 발자국이며, 그때 일어난 먼지가 문화리에 자욱하였으므로, 그곳을 ‘문지’, ‘먼지’라 부르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함암리 독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공암의 혈을 자른 이여송’, ‘용마가 나온 용수꾸리’ 등이다. 이여송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당시 2차 원병(援兵)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이다. 한편, 명나라 군대의 대변자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입장은 다양한 이야기로 묘사되고 있다. 문헌 설화에서는 이여송의 영웅적인 행위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구비 설화에서는 횡포를 부리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그중 한 가지가 조선의 인물을 끊어 놓기 위해서 혈을 찔렀다는 것이다. 또한, 용마는 장수가 탈 말이다. 일반적으로 아기장수나 실패한 영웅들과 연계되어 전승하는데, 여기서는 혈을 자른 이여송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