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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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英濟 |
영어공식명칭 | Son Yeong je |
이칭/별칭 | 덕유(德裕),추천(鄒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전기 밀양 출신의 학자.
[가계]
손영제(孫英濟)[1521~1588]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덕유(德裕), 호는 추천(鄒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통용교위 손신복(孫信復), 할아버지는 충순위 손세번(孫世蕃)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 손응(孫凝)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 조효동(趙孝洞)의 손녀로 조광원(趙光遠)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아내는 달성서씨 평장사 서균형(徐勻衡)의 후손인 현감 서시중(徐時重)의 딸이다. 자식은 5남 2녀이다. 손영제는 밀양의 향반이면서, 밀양손씨 교동파의 파조이다.
[활동 사항]
손영제는 1521년(중종 16)에 출생하였다. 이른 나이에 소과에 급제하였지만, 과거공부에만 힘쓰지 않고 학문으로 여러 차례 천거되어 여러 지역으로 훈도(訓導)를 역임하였다.
1555년(명종 10)에 김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건상상 문제로 바로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였다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曺佐郞), 예조좌랑(禮曺佐郞), 병조정랑(兵曺正郞), 예조정랑(禮曺正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569년(선조 2) 1월에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고, 1569년 3월에 암서헌(巖棲軒)에서 퇴계 문하에 입문하였다.
1570년 여름 예안향교를 중수하고 11월 8일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서거하자 경상감사에게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건할 것을 품의하였다. 이때 사재를 털어 기부하였다.
1572년 7월에 예안향교중수입약을 제정하고 훈도와 좌수 등 29명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573년(선조 6) 4월 조목(趙穆) 아버지의 상에 곽판(槨板) 등을 제공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도산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1574년 8월에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1575년(선조 7)에 금난수(琴蘭秀) 아버지의 상에 물품을 제공하였다. 1575년 여름 도산서원이 사액되자 400리를 달려와 직접 행사에 참여하였다. 1576년(선조 9) 밀양의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여표비(閭表碑) 건립을 주도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재령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서 울산부사(蔚山府使)에 보임되었다.
손영제는 1588년(선조 21) 10월 9일에 68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손영제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손영제가 남긴 시문은 11세손 손진구(孫振九)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의 서문과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의 발문을 받아 목판 2권 1책으로 간행한 『추천집(鄒川集)』이 있다. 1권에는 직접 지은 시문을 수록하였고, 2권에는 지인들에게서 받은 글과 유사, 행장, 묘갈 등 후대에 재생산한 글, 기타 참고자료를 모아 놓았다. 권1의 시문은 시(詩) 10수, 서(書) 14편, 퇴계에 대한 제문 1편이다.
[묘소]
손영제의 묘소는 추화산(推火山) 선영에 만들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손영제는 퇴계 이황을 생각하며 벼슬을 그만둔 뒤 밀양강 옆에 오연정(鼇淵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이라는 별서를 지었다. 오연정 내에 모례사를 세워 손영제를 봉사하였다. 모례사는 고종 때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