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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163
영어음역 Ppalchisan
영어의미역 Partisan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병옥

[정의]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전라북도 남원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 비정규군.

[개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것이 이념 분쟁 과정을 통하여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 빨갱이다.

육지에서의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여순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948년 10월 20일 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도에 투입하기로 하였는데, 이 부대의 선임하사관 지창수(池昌洙) 등이 반기를 든 것에서 비롯된다.

10월 19일 밤에 시작된 이 사건은 김지회(金智會), 홍순석(洪淳錫)의 지휘로 이어졌으나 10월 27일 순천과 여수를 토벌군(국군)이 탈환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사건에 참여했던 반군들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유격 투쟁은 본격화되었다.

[남원의 빨치산]

해방 정국에서 남원은 좌익의 세력이 대단했다. 미군정이 들어와 적산(일본인들이 남겨 두고 간 재산)을 몰수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던 인민위원회의 집회 때 남원경찰서 앞에 모인 군중을 4천 명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집회 때 미군 최초의 양민학살이 자행되어 적어도 3명이 사살당하고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이어 대대적인 좌익 탄압이 강행된 속에서 우익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대한독립촉성회의 양남식이 좌익에 의해 살해된 이후 계속된 좌익 색출과 탄압에 의해 남원의 좌익은 물밑으로 숨어들었다.

황의지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후 인민군이 입성하기 전 임시로 만든 남원군당위원회는 위원장 유준열(곧바로 김장록으로 교체), 부위원장 이운(은)수, 총무부장 형명기, 조직부장 안모, 문화부장 안준섭, 간부부장 최병팔로 조직을 꾸렸다고 한다.

최초로 남원유격대를 조직한 최정범의 증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조직부장의 안모는 안경호이며, 형명기가 간부였고, 내무서장은 한태준이었다고 보충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이 완료되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 7월 말이었는데, 9월 하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낙동강 전선 후퇴가 시작되자 좌익의 신분만 노출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1950년 9월 29일, 당시 남원군 내무서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최정범은 내무서원 약 30명을 이끌고 보절면의 천황봉으로 입산을 하였다. 이들은 야간에만 행군하여 춘천을 목표로 행군하기 시작하였으나, 계속되는 폭격과 경찰의 추적으로 장수군 산서면에서 다시 퇴각하여 천황봉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10월 3일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던 인민군 6사단 일부 장병들을 만나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하기로 하였다. 인민군 후퇴 병력은 이상윤 인민군 소좌와 장교 3명에 사병이 20여 명이어서 이들을 1소대로 하고 소대장에 이상윤을, 남원 내무서원 30여 명을 2소대로 하고 소대장을 최정범으로 하여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의 편제가 만들어졌다.

10월 15일경 남원군당 인민위원장 김장록이 부대를 찾아와 남원군당 군사부로 편입할 것을 제안하여 ‘남원군당 유격대’로 명명하였고, 이때에는 3개 중대의 약 백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때까지 보절면은 수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활동하기에 자유로운 상태였다.

곧이어 보절면이 수복되고 천황봉은 산이 크지 않아 은신하거나 비트를 만들고 대적하기가 어려운데다 군경의 공격이 심해져서 산내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군경의 공격이 심해지자 도당과 합류하기 위하여 1951년 1월 회문산으로 들어가 전북도당에 편입하고, 임실군 덕치면 멀티마을에 주둔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민군에게 상황이 유리해지자 남원군당은 행정기구를 미리 편성하였는데, 기존의 편제에 최정범이 민청위원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원군당에서는 지리산에 거점을 확보하기로 하고 최정범 외 두 명의 대원을 지리산으로 보내 장소를 물색하게 하였다.

1951년 3월 지리산으로 들어간 일행은 산내면 달궁마을 앞의 광산골로 아지트를 정하였고, 이어서 남원군당 산하 기관들이 옮겨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남원군당은 1950년 10월 14일에 만들어진 국군 11사단(사령관 최덕신)의 빨치산 토벌사령부의 운장산 토벌작전을 피하게 되었다. 이런 거점 이동은 이후 회문산이 무너지고 전북도당이 지리산으로 들어올 때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남원군당은 완주의 운장산까지 도피하였다가 덕유산으로, 다시 지리산으로 쫓기면서 거의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군당국의 추계에 의하면 1952년 3월 10일 기준으로 지리산 지구 잔존 빨치산을 1,248명으로 추정하였고 1953년 7월 27일 현재 남한의 잔존 빨치산을 1,388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중 전북도당이나 남원군당에서 활동하던 인원이 몇 명 정도나 남아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53년 9월 18일 남한 빨치산의 총수이며 남부군 사령관이던 이현상이 전라남도 구례군 빗점골에서 사살됨으로써 남부군에 소속되어 있던 남원군당 역시 해체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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