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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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帥山祭-關聯資料 |
이칭/별칭 | 연기원수산산신제문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임영수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원수산에서 지낸 산제와 관련된 고문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원수산(元帥山)[254m] 중턱에 위치한 산제당에서 매년 동짓달 초이틀[음력 11월 2일] 자시에 마을의 안녕과 동네사람 모두가 한 해 무사하기를 원수산 산신께 비는 산제가 이루어졌다. 수백 년 전부터 이루어진 전통 세시로, 원수산 산신제를 기록한 자료가 원수산 산제당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가 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도 많이 유실되었다.
현재는 산제를 지낼 때 지켜야 할 항목을 기록한 책과 주민들로부터 받은 제물 등을 기록한 산제계를 기록해 놓은 책, 산제 제관 분방기를 기록한 책, 제수 마련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 산제를 준비한 내용을 기록한 책 등 다섯 권의 책은 원본이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이 다섯 권의 사본과 산제 홀기(笏記)[혼례나 제례 때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 고소장, 한글 축문 등의 원본이 연기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원수산 산제당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에 의하면 과거에 산제를 지낼 때 갈운리 원사골, 양화2구의 꿩말, 상촌, 월룡, 희여물(백동) 등의 마을에서 100여 호가 참여하였다. 각 마을 대표들이 해마다 제관을 뽑아 정성을 다하여 산제를 지냈고, 기록은 유사가 남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산제홀기(山祭笏記)
이 책은 가로 14㎝, 세로 21㎝이다. 표지에는 산제홀기라 쓰여 있다. 내용은 산제 지내는 홀기가 7쪽, 산제축문(山祭祝文)이 3쪽으로 실려 있다.
책 뒤표지에 제작연대가 적혀 있다. 병자 10월 25일(丙子 十月 二十五日)이라고 쓰여 있다.
2. 고소장(告訴狀)
이 문서는 한 장으로 되어 있다. 가로 30㎝, 세로 22㎝이다.
문서에는 남면 가학동에 사는 통장 임노원 등이 본동 뒤편에 있는 원수산의 산제를 100여 년 전부터 지내오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산제를 지낼 때 소를 잡아 사용하였는데 더 이상 못 잡게 하였기 때문에 잡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과 이 문서를 올린 날인 융희 원년(1907년) 11월 31일 군수서리에게 올렸는데 이에 대한 답신이 적혀 있다. 끝에는 군수서리의 직함과 연기군수의 직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으로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첫 번째 책자는 크기가 가로 20㎝, 세로 23㎝이다. 분량은 총 108쪽이다. 처음에는 우6행지목(右六行之目)으로, 산제를 지내면서 지켜야 할 항목이 적혀 있다. 이어 우팔형지목(右八刑之目)이 적혀 있고, 그다음부터는 산제를 지내는데 헌사한 사람들 명단이 있다. 고정댁 1량, 석현댁 1량, 사송정댁 1량 등 부인들의 헌사 내역이 적혀 있다. 이때 유사는 임익종, 공원은 임달상이다. 여자들에 이어 남자들이 적혀 있다. 임천종, 임학종, 임박연, 임상연, 임선연 등이다.
시기는 병진 11월 초 4일이다. 다음에는 정사 11월 초 2일이 적혀 있다. 그 후 계속해서 부인과 남자 명단이 지명과 함께 적혀 있고, 상벌 내용도 있다. 마지막이 기축년 12월 12일 동계 내용이다.
두 번째 책은 가로 20㎝, 세로 20㎝이다. 정묘 11월 초 3일로 시작한다. 부인들이 낸 쌀이 기재되어 있고, 뒤에 돈을 낸 기록도 있다. 무진년 10월 24일 기사 10월 28일 산제계 내용이 적혀 있다. 마지막에는 기사 정월 5일, 유사에는 임헌빈, 공원은 임진철이다. 책의 분량은 220쪽이다.
세 번째 책은 크기가 가로 23㎝, 세로 22㎝이다. 시작이 을축 11월 3일이며, 산제 제관 분방기가 적혀 있다. 초헌 임자철, 아헌 임병두, 종헌 임기철, 집례 임성철, 대축 임진철 등이 적혀 있다. 계속 제관 분방기가 적혀 있으며, 기사 11월 초 3일에는 제수장만이 적혀 있다. 모두 13쪽 분량이다.
네 번째 책은 크기가 세로 23㎝, 가로 38㎝이다. 첫 장에 경진 11월 3일 산제 제수 마련 내용이 쓰여 있다. 이어서 무술 11월 3일이다. 그다음 해부터는 제수가 한글로 적혀 있으며, 헌관분방기 제수 마련 기록이 있다. 마지막 기록이 정해년 2월 3일 분방기이다. 총 12쪽이다.
다섯 번째 책은 표지에 1974년 음 2월 3일이 적혀 있다. 책 크기는 세로 21㎝, 가로 20㎝이다. 갑인년 2월 3일 산제 준비 내용을 시작으로 분방기가 적혀 있다. 마지막은 병인년 11월 3일 산제 지낸 내력을 적었다. 모두 26쪽으로 되어 있다.
4. 한글 축문
한글 축문은 가로 21㎝, 세로 40㎝ 크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유세차 경술 십일월 계축삭 삼일 을묘 유학 임헌표 등 감소고우
원수산 지신 복이 천지정긔, 방박위산, 치우연람, 원수기존, 상응천궤, 하응강만, 령긔소종, 신리공소, 용출백리, 리급군생, 환이가자, 퇴의명언, 유자동맹, 의앙최근, 범긔백가, 범긔천인, 이강이부, 유신우지, 기생기아, 유 신경지, 유 선필즐, 유죄필서, 소재치상, 젼액위경, 재족필달, 사즉필성, 도사명신, 여후직신, 연수사인, 석풍사인, 요자무지, 긔자포지, 병사소지, 췌자영지, 호생이장, 찬천향지, 왕국지생, 태평기제, 재아성명, 치아결소, 경천비구, 간독신청, 신기보아, 영수, 소항.
[형태]
원수산 산제 관련 문서는 모두 한지에 먹으로 글을 썼다. 고소장만 줄 쳐 있는 양지에 붓으로 글을 썼다. 책은 총 6권이며, 홀기가 포함되어 있다. 낱장은 고소장과 한글 축문 두 점이다.
이들은 산제당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흩어지게 되었다.
[구성/내용]
원수산 산제의 자료는 낱장 2점과 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낱장 2점 중 하나는 산제를 지낼 때 소를 잡아서 지내는데 소를 못 잡게 금지하자 원수산 산제는 100여 년 전부터 해마다 소를 잡아 지냈으니 이를 허락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것은 산제 축문으로 한자를 한글로 음만 적은 것이다. 즉 시대가 흐르면서 산제 지내는 제관이 한자를 잘 모르자 이를 한글로 옮겨 적어 이것을 한 부 가지고 지낼 때마다 이것을 필사하여 사용하였다.
6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은 원수산 산제의 순서인 홀기가 적혀 있고, 이어서 축문이 적혀 있다. 표지 안쪽에는 진설이 적혀 있다.
나머지 다섯 권의 책은 표지가 없이 오래도록 방치되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지만 제사를 지낼 때 헌금한 내용과 제수 준비 내용이 쓰여 있다. 간간이 분방이 쓰여 있으며, 산제를 지내고 마을회관에 모여 그해 마을에서 뽑은 사람에게 상과 벌을 준 내역이 써 있다.
[의의와 평가]
원수산 산제는 단순한 산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의 미풍양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담겨 있으며, 그 시대의 중요한 마을 역사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