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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생면사무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526
한자 樂生面事務所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191지도보기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서승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관공서
설립연도/일시 1911년 3월 6일연표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있었던 낙생면 관할 행정 기관.

[개설]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일원적 지배 구조를 위해 1911년 면 단위 행정 체계를 수립하면서 만들어진 낙생 지역의 행정기관이다.

[설립목적]

일제강점기에는 군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던 지방의 행정 체계를 소규모의 면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일제는 이를 토대로 면 단위까지 경찰·행정관서 등을 설치하여 총독이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탄압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낙생면사무소 또한 이 시기 식민지 탄압의 차원에서 설치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낙생면판교리라 하였고 낙생면을 포괄하는 광주군은 1895년 한성부의 관할이었으며 경기도 광주부가 되었다가 1906년 광주군이 되었다. 1906년 낙생면삼가리, 판교리, 대장리, 산운리, 하산운리, 금곡동, 석운리 등 14개 동리를 포괄하였다.

낙생면사무소는 1911년 3월 6일에 판교리 191번지에 개소하였고 낙생면, 돌마면, 대왕면을 통합하여 관할하였다. 낙생면사무소의 초대 면장은 3.1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남태희였다. 1917년 10월 면제시행규칙에 따라 돌마면 임시출장소와 대왕면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분할되었다.

[주요사업과 업무]

낙생면사무소는 근대적 행정에 의한 편의 제공보다는 일제 침탈의 선봉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결과로 인해 타도와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활동사항]

역사적으로 볼 때 낙생면은 1760년 5개의 동에서 1906년에는 14개 동리로 증가한 것이 특징이다. 1790년을 기준으로 총 호수가 634호였으며 남자가 1,467명, 여자가 1,485명으로 나타난다. 1911년 낙생면사무소가 개소되어 업무를 관장하였다.

[현황]

해방 후 낙생면은 광주에 편입된 상태였지만 1971년 9월 성남의 주택단지 경영 사업으로 인해 성남출장소 관할 구역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함에 따라 면사무소의 기능이 시행정 업무를 관장하는 동사무소로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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