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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873
한자 李之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성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517년연표보기
몰년 1578년연표보기
본관 한산(韓山)
형백(馨伯)
토정(土亭)|수산(水山)
시호 문강(文康)
주요 저술 『토정비결(土亭秘訣)』|『토정집(土亭集)』

[정의]

1517년(중종 12)~1578년(선조 11). 조선시대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이고, 호는 토정(土亭), 수산(水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이며, 증이조판서 이장윤(李長潤)의 손자이며, 우봉현령(牛峰縣令) 이치(李稚)의 아들이다. 우의정 김극성(金克城)의 외손으로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있었다.

[활동사항]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뜻을 두지 않다가 형 이지번의 권유로 글을 배우며 발분,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밤을 세워 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형을 어머니와 스승처럼 섬겼다고 한다. 학문에 힘쓴 결과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다.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친분을 쌓았고, 뒷날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친 조헌(趙憲)으로부터는 스승으로서 예우를 받았다.

생각과 행동이 남다르고 파격적이어서 많은 기이한 일화를 남겼는데, 토정이라는 호만 하더라도 서울 마포 강변에 토실(土室)을 지어 밤에는 거기서 쉬고 낮에는 평평하게 만든 토실 위를 정자(亭子)로 하여 지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궁벽한 생활과는 달리 늠름한 풍채를 지녔으며, 눈빛은 사람을 움직일 만큼 빛나고 기개 또한 당당하였다. 가문이 당쟁의 화를 자주 당한 데다가 친구 안명세(安名世)가 사관(史官)으로 을사사화(乙巳史禍)의 진상을 직필, 뒤에 권신의 무고로 원통하게 죽하자 벼슬을 멀리하였다.

이후 이승의 허무를 느끼고 명리(名利)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 전국 각지를 유람했고, 노도 없는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제주도에도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특히 심신단련에 힘써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을 마시며 추운 겨울에는 얇은 옷을 입고 지내기도 하고 눈 위에 눕기도 했으며, 혹은 10여 일간 곡기를 끊는 등의 수련을 쌓기도 하였다.

1573년(선조 6)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천거되어 6품 벼슬에 올라 포천현감(抱川縣監)에 임명되었다. 포천은 원래 땅이 척박하여 풍년에도 추수 뒤에 공사채(公社債)를 갚고 나면 양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가난한 현민을 구제하기 위해 소속이 없는 무주(無主)의 해도(海島)를 얻어 기민(饑民)을 모아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많은 양곡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물욕이 없이 일생 동안 청빈한 삶을 살았고 성리학은 물론 의약, 복서(卜筮), 천문, 지리, 음양, 술서(術書)에 모두 능통하였다. 각 지역의 실태와 경제사정에 정통한 것을 바탕으로 경제실용학에 입각한 산업진흥과 상업의 중요성에 대해 선진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추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타]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서도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는 『土亭集(토정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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