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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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婚禮式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수정구 수진동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대화 |
[정의]
남녀가 혼인하는 의식.
[사례 1 - 1940년대]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김씨의 사례. 1929년생, 1947년 혼인) 혼례식은 신부집 대청마루에서 했다. 신랑은 혼례식 당일 왔다. 이때 ‘함재비(함진애비)’가 따라 왔는데, 신랑댁 마을의 ‘광복씨’가 했다. 또 혼례식에는 혼주로 ‘우유샌님’이 따라 왔는데, ‘사촌 시아주버니’가 그 역할을 했다.
신랑 일행이 도착하자 제일 먼저 함을 받는 절차를 했다. 이른바 ‘봉채시루(시루떡)’ 위에 신부 아버지가 받아 올려놓고 함 안에 손을 넣어 옷감을 집었다. 빨간 옷감을 집으면 첫아들을 낳고 파란 옷감을 집으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김씨 아버지는 파란 감을 집었는데, 사람들이 첫딸은 살림밑천이니 낳으면 좋다고 했다. 함 안에는 주로 패물과 옷감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뉴똥’이란 옷감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받으면 잘 받았다고 했다.
함 안에는 홍어구, 청어구, 은반지, 은비녀와 함께 비로드(우단)가 있었다. 사실 금반지와 금비녀를 받으면 최고인데 신랑댁이 그렇게 잘살지 못해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러나 비로드를 받아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당시의 최고의 옷감이었기 때문이다. 신랑의 집에서 오는 행렬에는 함재비, 우유샌님과 함께 기러기아범이 같이 왔다. 기러기아범은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함을 받은 절차가 끝난 후에 기러기아범이 초례상에 가서 기러기를 올려놓으면 혼례가 시작되었다.
상 위에는 초, 밤, 대추, 팥(2주발), 찹쌀, 그리고 수탉을 양쪽에 한 마리씩 올려놓았다. 초례상 앞에서 기러기아범이 기러기를 신랑에게 전달했다. 신랑은 혼례상에 기러기를 놓은 다음 절을 두 번 했다. 혼례를 주관하는 사람을 ‘하님’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신부측 사람이 맡았다. 하님은 잘생기고 혼인을 했으며, 첫아들을 낳은 사람으로 선택했다. 하님이 혼례식을 주관하여 서로 절을 시키고 신랑과 신부에게 각각 술도 마시게 한다. 모든 혼례식이 끝난 후에 수탉은 그 자리에서 날려 보냈다. 초례상에 놓인 찹쌀을 ‘색씨찹쌀주발’이라고 하여 혼례식을 끝낸 후 시집에 갈 때 가지고 갔다.
혼례식이 끝난 후에 바로 짐을 싸가지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가기 전에 신랑은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의 옷은 신부 어머니가 만든 것이다. 갈 때는 신부의 모든 짐을 지고 갔다.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장롱과 경대를 가지고 갔다. 사실 장롱과 경대는 그리 많은 사람이 해가는 것은 아니지만, 친정아버지가 약국을 하여 잘 해준 것이다.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우시고, 아버지는 언니에게 소금을 가져다 뿌리라고 하셨다.
김씨가 처음 시댁에 와서 가마에서 내릴 때 시어머니가 가마니 자루를 펴 주어 그것을 밟고 내렸다. 가지고 간 ‘색씨찹쌀주발’ 담긴 찹쌀을 마당에 뿌린 후에 들어갔다. 다음에는 시댁에 들어가 시댁 어른들과 식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먼저 간단한 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술을 올리고 시댁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다. 요즘처럼 대추를 받거나 밤을 받은 것은 아니다.
[사례 2 - 1980년대]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 배씨의 사례. 1953년생, 1981년 혼인) 혼례식은 1981년 성남의 모란예식장에서 했다. 혼례식을 친정인 남원에서 할까도 생각을 했는데, 당시의 남원은 예식장 규모가 작아 성남에서 하기로 하였다. 주로 남편의 회사 동료들과 일가친척들이 성남에 많이 살아 그렇게 결정하였다. 신부측 사람들은 혼인식 당일 아침에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타고 올라왔다. 배씨는 혼례식 날에 시중을 들어 줄 친구와 함께 전날 올라왔다. 혼례식 날 아침 배씨는 신랑이 태워주는 택시를 타고 예식장에 와서 화장을 하였다. 그동안 짐은 같이 올라온 친구와 시누이가 들어 주었다. 드레스도 이미 혼례식장에서 빌리기로 하여 큰 문제는 없었다. 혼례식은 오후 3시에 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손님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혼례식 주례는 신랑의 고등학교 은사님이 해주셨다. 사회는 회사 동료가 보았다. 먼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나가 촛불에 불을 붙이고 신랑이 입장한 후에 배씨가 친정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였다. 그리고 주례사를 들은 후에 반지를 교환하고 혼례식을 끝냈다.
혼례식은 약 30분 정도를 하였다. 혼례식이 끝난 후에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집안 식구들과 사진을 찍고, 다음으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둘러싸고 부케를 던졌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 가서 한복을 갈아입고 시어머니에게 폐백을 드렸다. 이때 신부 배씨는 족두리에 혼인식 한복을 입고 신랑은 사모관대를 했다. 시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시어머니의 동생이 같이 폐백을 받았다. 시아버지쪽으로는 아무도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혼례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는 예식장 옆의 식당에서 갈비탕을 대접하였다. 신부측과 신랑측이 각각 2층과 3층으로 층을 달리 했다. 친정어머니는 오시면서 떡과 부침개 등 음식을 해가지고 오셔서 손님들의 식탁에 놓고 다 드시고 가시는 손님에게는 조금씩 싸 주셨다. 배씨는 폐백을 끝나고 평상적인 한복(노랑저고리에 파란치마)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식당에 내려가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혼례식에 참석한 대부분의 어른들은 돈을 가지고 오고 신부의 친구 몇몇은 물품으로 대신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화장품 세트를 사 주고 믹서기를 해 주었다.
혼례식을 마치고 배씨는 2박 3일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시어머니는 집에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소금을 뿌려 액막이를 하였다.
[전망]
과거 가정에서 유교식으로 치르던 혼례식이 근대화 및 가정의례준칙 등의 영향으로 예식장에서 서양식으로 치르는 것으로 바뀌면서 전통혼례의 모습을 모방한 ‘폐백’이 뒤따르는 절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예식장에서 치르는 정형화된 혼례식에 거부감을 갖고 개성을 살리는 혼례식을 치르는 사례도 조금씩 늘어나는 실정이다.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특성상, 장기적으로 볼 때 혼례식은 획일화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모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