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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384
한자 上松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곽현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개설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92㎢
가구수 23가구
인구[남/여] 50명[남 25명/여 25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들어온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마을이 학이 솔밭으로 날아드는 형상이라 하여 상송(上松)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 전부터 이 마을을 소란(巢卵)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학이 둥지에 있는 알을 품으려고 날아드는 비학소란(飛鶴巢卵)이란 말에서 새집 속의 알, 곧 소란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안소란, 밭소란을 병합하면서 상송리(上松里)라 하였다. 그 후 현재까지 외송(外松) 마을, 내송(內松) 마을로 부른다. 내송 마을은 온천 지구로 고시되어 개발이 마무리되면 관광지로 각광받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상송리 내송 마을 입구 주위에 주공(鑄工)들이 생활하였다고 전해진다. 주공들은 옛 주점소(鑄店所)인 성냥간[대장간]을 짓고 불무통에 쇠를 녹여 호미, 괭이, 낫 등 생활 도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김제 지방에서 채취한 사금이나 쇳가루를 짚 섬 속에 넣어 짊어지고 줄을 지어 서마리 하마 마을 앞을 지나 상송재를 넘어 주점소에 운반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주점소 터가 두 곳 있는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지나면서 고려자기 생산으로 생활이 나아지면서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

상송리복흥면 동쪽에 위치한다. 백방산(栢芳山)의 서남쪽 지류는 소백방산(小栢芳山)[508.9m] 아래에서 동남쪽으로 급히 돌아 낙덕 저수지 제방 아래 추령천에서 머무르고, 백방산과 소백방산 중간 지점에서 지맥 하나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결인되었다가 솟아오른 것이 529m 높이의 투구봉이다.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추령천에서 머무르면서 마을이 형성되니 하송 마을이고, 두 갈래로 내려온 산맥 사이로 골짜기가 이루어진 막바지에 상송 마을이 이루어졌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상송리의 면적은 2.92㎢이며, 인구는 23가구, 50명으로 남자가 25명, 여자가 25명이다. 1개 행정리와 1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도 792호선이 지나간다. 낙덕 저수지에 이르기 전 외송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오고, 다리 건너편을 보면 바로 왼편에 암벽이 보인다. 암벽 위에는 노송들에 둘러싸인 정자가 있다. 낙덕암 위에 세워진 낙덕정(樂德亭)이다. 낙덕정은 1900년(고종 37)에 상송리에 거주하던 김노수(金魯洙)가 세운 것이다. 김노수는 조선 중종 때의 명유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후손이다. 김인후는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개탄하며 관직을 사임하고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던 가인 김병로(金炳魯)가 소년 시절 이곳에서 공부하며 한때를 보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04 현행화 [상세정보] 가구수, 인구 변경, [현황] 인구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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