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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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逸松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교철 |
출생 시기/일시 | 1933년 - 권일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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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권일송 영흥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권일송 『한국 일보』와 『동아 일보』 신춘문예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9년 - 권일송 문태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권일송 『주간 한국』에 장편 서사시 연재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권일송 서울 상경 |
활동 시기/일시 | 1975년 - 권일송 한국 문인 협회 시 분과 위원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76년 - 권일송 한국 현대 시인 협회 부회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80년 - 권일송 『문학 동아』 창간호 간행 |
활동 시기/일시 | 1982년 - 권일송 『한국 경제 신문』 논설위원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95년 - 권일송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11월 15일 - 권일송 시비 건립 |
출생지 | 권일송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가잠 마을 |
학교|수학지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활동지 | 권일송 활동지 - 전라남도 목포시 |
활동지 | 권일송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권일송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설산 인근 |
성격 | 시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한국 경제 신문』 논설위원 |
[정의]
현대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시인.
[활동 사항]
권일송(權逸松)[1933~1995]은 1933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가잠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광주 고등학교와 전남 대학교 공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1956년 전라남도 목포시 영흥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1월 『한국 일보』 신춘문예에 「불면의 흉장」이,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강변 이야기」가 동시에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국 일보』 시 부문 심사 위원은 조지훈·노천명 시인이, 『동아 일보』는 김동명·주요한 시인이었다.
1959년 전라남도 목포시 문태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목포 지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문예반을 결성하여 목포 문학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63년 목포에서 제1회 시화전을 개최하고 1960년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인 박봉우·강인섭·박열아·박이도 시인 등과 ‘신춘시’ 동인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1965년 『주간 한국』에 장편 서사시 「미처 못다 부른 노래」를 25회 연재하였다. 1970년 목포 생활을 마무리하는 ‘유달산이여 안녕’이라는 주제로 고별 시화전을 개최하고 1970년 10월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 권일송은 1973년 한국 문인 협회 이사와 한국 시인 협회 중앙 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1974년에는 문인극 「환상 부부」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울산 공연까지 하였다. 1975년 한국 문인 협회 시 분과 위원장과 1976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와 한국 현대 시인 협회 부회장을 맡고 1977년 6월 국제 펜클럽 한국 대표로 중동과 유럽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도서 출판 문학 동아를 등록하고 1980년 무크지 『문학 동아』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1982년 『한국 경제 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87년 재경 전북 향우회 고문과 제52차 서울 국제 펜대회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91년 옥천 향토 문화 사회 연구소 고문을 맡고 지역 향토 문화 발굴과 진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권일송은 살다 간 세월만큼이나 남겨진 추억과 일화(逸話)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에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과 중구 무교동에서 ‘흑산도’라는 홍어 횟집을 차렸던 일은 많은 문인들의 입에 회자된다. 그가 운영하는 흑산도에는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드나들었고 주머니가 가난한 문인들이 붐빈 덕에 마음씨 고운 주인은 끝내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여성 문인들에겐 남달리 친절하였던 탱고의 명수였다. 적잖은 여성 문인들이 그와 함께 탱고 리듬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시집으로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1966]·『도시의 화전민』[1969]·『바다의 여자』[1982]·『바람과 눈물 사이』[1987]·『비비추의 사랑』[1988]·『바다위의 탱고』[1991]·『숲은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1994]가 있다. 에세이집으로 『한해지에서 보내온 편지』[1973]·『사랑은 허무라는 이야기』[1980]·『우리들의 시대를 위하여』[1988]·『미완의 길목에서』[1989]·『슬픔을 가르쳐드립니다』[1990], 번역서로 『대낮의 함정』[1979]·『어쩐지 크리스탈』[1981]·『미피아』[1982]·『세계는 이렇게 변한다』[1982]·『거미의 여자』[1982]·『성자와 빵』[1983]이 있다. 그밖에 수상집으로 『이 성숙한 밤을 위하여』[1978]·『생, 왜 사랑이어야 하는가』[1979]·『수녀의 길을 걷기까지』[1981], 칼럼집으로 『항우와 유방』[1980]·『전환기의 새벽』[1994], 해설집 『현대시의 이해』[1981], 평론집 『윤동주 평전』[1987], 공저로 『중동의 한국인』[1977] 등이 있다.
권일송은 첫 시집에서는 현실 증언의 사상과 사건에서 주제 의식을 보여 주고, 제2 시집은 전통의 터전을 깨고 산업화로 치닫는 도시화 과정에서의 주체성 상실을, 제3 시집은 시인의 음색과 음량을 구축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역사로부터 소명 의식을 깨닫고 있으며, 제4 시집은 독재와의 저항 의식을 시화하고 있고, 제5 시집[시선집]을 거친 제6 시집은 시행착오의 수렁을 헤집고 관조와 달관에 원숙해진 시 미학의 개척을 보여 주고 있다. 제7 시집은 통속의 굴레에 매달린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진정 시가 인생의 밝힘이요 구제인가를 자문자답하면서 모국어로부터 조국의 시를 캐는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묘소]
[상훈과 추모]
1983년 제1회 소청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85년 제8회 현대 시인상, 1988년 ‘순창 군민의 장’ 문화장을 수상하였다. 2003년 11월 15일 한국 문인 협회 순창 지부에서 남산대 귀래 체육공원에 권일송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는 성신여자대학교 미술과 장윤우 교수가 반딧불이 형상으로 설계하여 조각하였으며 화강석에는 권일송 시인의 대표작인 「반딧불」의 일부가 이근배 시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