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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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干阿之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정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2월 - 「열녀 간아지」 『순창의 전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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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지 |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동 |
성격 | 여성 지조담|열행담 |
주요 등장 인물 | 간아지|유문표|유동현 |
모티프 유형 | 절개를 지킨 여인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간아지의 열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열녀 간아지」는 순창의 관비였던 간아지(干阿之)가 유문표 한 남자만을 섬겼고 죽을 때까지 개가를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는 여성 지조담이자, 열행담(烈行談)이다. 후에 간아지의 이런 열행이 알려지면서 조정은 정려비를 내렸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2월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전설』의 96~97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양정욱이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동에서 주민 류한상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간아지는 순창군의 관비였다. 이때 유문표가 순창의 유생 훈도로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선비를 대접하는 관행이 있어 간아지는 시임 관장의 배려로 유문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간아지는 유문표의 첩실로 들어갔다. 유문표는 평소 지행이 있었는데 유문표가 임지를 떠나게 된 후에 간아지는 어느 사대부가의 규수도 따르지 못할 정숙한 부덕을 지켰다.
유훈도가 떠난 후에도 간아지는 일편단심 그만을 생각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부모와 이웃 사람들은 간아지에게 개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출신 성분이 관비이다 보니 간아지는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일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아지는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치고 담담하게 살아갔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유훈도가 세상을 뜨게 되자 3년 동안 얼굴을 가꾸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상복을 입었다.
그런 후에도 그 부모가 개가할 것을 거듭 강요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간아지는 손수 자기 머리를 자르고 유문표의 본가인 담양 어그실 마을로 도망가서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512년 중종이 전국에 있는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빠짐없이 조사하여 책자로 만들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남온은 “고 유문표 훈도의 관첩 간아지는 훈도가 임지를 떠난 후에도 믿음을 지켰고, 또 훈도가 죽은 후에도 3년 거상을 하였으며, 부모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머리를 깎고 집으로 도망하여 절개를 온전히 지키고 평생 혼자 살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간아지의 충정을 기리어 정려비를 내렸다.
이 정려비는 순창의 객사 앞 한다리[大橋] 가에 세워졌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빗돌만이 남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다리 보수 공사를 하면서 그 주변을 마구 파헤치면서 빗돌은 나뒹굴었다. 그때 금과면 남계리의 문화 유씨 문중에서 그 빗돌을 수습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 뒤꼍에 있는 제각 뜰방에 옮겨 놓았다.
그런데 그해 섣달 그믐에 문화 유씨 문중의 사람인 유동현의 꿈에 한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왔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슬프도다.” 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잠에서 깨어나 유동현은 예사롭지 않은 꿈 때문에 시름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불빛이 방문에 환하게 비쳐 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보니 바로 얼마 전에 옮겨다 놓은 간아지의 빗돌이 있는 제각에 불이 붙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로 제각을 잃은 문화 유씨 문중 사람들은 회의를 열어 의논하였다. 비록 간아지가 관비 출신의 관첩이라지만 유훈도만을 섬기며 평생을 수절하였고, 나라에서도 이미 절부로 인정하여 정려를 내린 지 오래 되었으니 간아지는 유훈도 집안의 사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간아지의 빗돌을 유훈도의 묘 아래에 세우게 되었다. 담양군 대덕면 비채리에 있는 유훈도의 묘 아래에 있던 간아지의 정려비를 2000년 11월 순창 군청 옆 순창 등기소 옆으로 옮겼다. 그 빗돌 바로 옆에는 간아지의 제단이 모셔져 있는데,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열행을 추모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열녀 간아지」의 주요 모티프는 ‘절개를 지킨 여인’이다. ‘충, 효, 열’은 조선 시대에 가장 강조하던 유교적 덕목이었다. 따라서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열녀조를 중심으로 열녀의 유형을 살펴보면 수절(守節), 여묘(廬墓), 위난(危難), 봉양(奉養), 자살(自殺) 등으로 구분되는데, 「열녀 간아지」는 ‘수절’에 속하는 열녀담이다. 간아지는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지아비로 모신 사람을 위해 평생을 수절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3년 거상도 정성스럽게 하였다. 이에 조정으로부터 정려비도 내려 받았다. 「열녀 간아지」는 조선 시대에 강조하였던 유교적 덕목은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 간에 충, 효, 열 등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