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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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丙申年倭亂 |
영어의미역 | Struggle of the Righteous Armies aginst Japan Invasion in 1895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1895년과 1896년에 울진과 영해의 유진소에 침입한 왜군을 사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결과 청·일 양국 간에는 마관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함께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이 동양 평화에 해롭다는 구실을 붙여 반환을 요구하는 삼국간섭(三國干涉)을 했고, 일본은 이 요구에 굴복하여 요동반도를 반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간섭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선 정부 내에서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민씨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도움을 받은 명성황후는 정부 내의 친일 세력인 박영효(朴泳孝)를 몰아내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을 기용하여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 동안 진행되고 있던 개혁도 일단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발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후임으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낭인(浪人)과 군대를 동원하여 궁중을 침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조선 정부 내에서 친러파가 퇴진하고 새로운 친일내각이 수립되면서 일시 중지되었던 개혁을 다시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추진된 을미개혁을 통해 단발령이 시행되었는데, 국왕이 앞장서서 시범을 보이면서 머리를 자를 것을 강제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이 온 국민의 감정을 크게 자극한 데다 유교적 명분에 완전히 배치되는 단발령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들 두 사건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전국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과 친일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을미사변 직후 충청도 보은에서 문석봉(文錫鳳)이 처음으로 기병하였으나 단발령이 발표된 직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경기도 이천·여주의 박준영(朴準英) 등이 대표적인 의병이었다. 이들은 1896년 전반까지 중앙에서 파견된 친위대나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다가 아관파천 후 국왕이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림으로써 해산되었다.
당시 울진에서는 주병헌·전치일·이성인·장병하·최재인·박춘근 등이 유진소를 설치하고, 유진장에 주병헌을 추대하였다. 평해에서도 장필환·황경희·안위·정수 등이 유진소를 설치하였다. 이 해 죽변항에 해삼잡이를 가장하여 국정을 염탐하러 온 왜선 5척 중 3척을 최재인이 포군 50명으로 격파하였으며, 왜인 31명을 사살하였다.
평해의 유진소에서는 후포항에 잡입한 일본 선원 8명을 사살하였으나 죽변항에 염탐하러 온 왜인 1인이 살아서 부산으로 도주하여 일본군 함장에게 보고하자 일본 해군 1지대가 군함 1척으로 1월 30일 죽변항에 상륙하여 후당동의 전복기·주계조·전정기·강극막·전연심·전영식 등 6명을 생포하여 인질로 삼아 수많은 백성을 사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질들을 처형하였다.
[결과]
평해에서는 아전들이 유진소가 학정을 자행하였다고 경무사 이상준에게 고발하여 유진장 이하 3명을 사형함에 따라 울진과 평해의 병신년 의병 유진소는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의병운동은 병오년 의병운동의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