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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에 오기까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D020101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동

제주도 잠녀가 이곳에 오기까지는 한국사의 대외적인 사실과 연결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제주 지역에 일본인의 출입이 잦아진다. 당시 일본은 자본주의에 따른 근대공업의 발전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를 가까운 제주도에서 유출하였다. 인구의 감소와 함께 일본 연안의 해산물 감소에 따른 제주도 해산물 수요의 증가에 의해 나잠업을 하는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하지만 곧 잠녀의 수에 비해 해산물은 적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은 해조류가 풍부한 육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죽변은 제주 잠녀가 봄·여름 동안 배를 타고 동해안선을 따라 물질을 할 때 중간 정착지였다. 4월부터 8월 잠녀들은 일본인을 따라 죽변에 들러 해산물을 채취하였고 9월이 되면 그들의 고향 제주도로 돌아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당시 이러한 제주도 잠녀들을 출가잠녀라 하였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갈 당시 일본인을 따라 온 경우도 있지만 해조상(海調商)이라고 하여 제주도를 돌며 해녀들을 모집하는 상인들을 따라 오는 경우도 있다. 출가잠녀의 경우 가족들은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홀로 육지로 나와 있는 반면 가족들이 함께 이곳에서 거주하는 정착잠녀들이 있다.

정착잠녀는 가족들이 함께 육지로 나와 한곳에 정착하여 거주하는 것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죽변에서는 잠녀 인솔자가족이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다. 당시 죽변으로 출가하는 잠녀들은 100여명으로 이들을 인솔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 중 5~6명은 죽변에서 정착해 거주하였다. 출가한 잠녀들은 죽변4리 지금의 잠녀촌이 있는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판자집에서 거주하였는데, 보통 4월에 나오면 8월에 돌아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월세를 주고 방을 얻어 거주하였다. 한 집에는 혼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떠나온 동료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객지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 크다. 조그만 방에서 함께 잠도 자고 밥도 해먹고 바다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형제자매처럼 지내게 되는데, 종종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들에게 상호 의자매가 맺어지기도 한다.

1960년대 들어 오징어 어업이 활기를 띄고 제주도에서는 환금작물 재배에 따른 수익으로 나잠업이 쇠퇴를 하자 단기적으로 출가하던 잠녀들은 가족 단위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9월 이후 날씨가 추워 나잠업을 할 수 없는 시기 오징어잡이를 남편 또는 가족들이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죽변에 정착한 잠녀 가족은 40호가 넘었으며, 출가 잠녀들도 100여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962년 개정된 수산어법에 의해 어장의 소유권이 어촌계로 명시되면서 이전과 같이 자유롭게 이동하여 잠녀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어촌계에 소속된 자만이 관련 바다의 어획물을 채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부의 잠녀들은 이곳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규제에 의한 자유로운 해산물 채취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많은 잠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중간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면서 죽변에서 잠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리고 1970년대 변동을 겪던 잠녀들은 최종적으로 9명이 이곳에 이주해 오고 죽변4리 출가잠녀와 정착잠녀들이 머물렀던 판자촌에 자신들만의 영역인 모듬촌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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