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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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溪- |
영어의미역 | Samgye2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삼계2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형분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본 마을의 명칭을‘삼계’라고 칭한 것에 대한 유래나 문헌적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통도사 뒷산인 영취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양산천, 천성산 지푸네골에서 발원한 시내, 내석 마을에서 발원한 내석천 이 세 하천이 마을 위쪽에서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삼계마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삼계(三溪)는 석계(石溪)와 마찬가지로 이두로 추정된다. 이두에서 ‘삼(三)’은 ‘셋’으로 읽힌다. 그리고 ‘계(溪)’는 그 훈이 ‘시내’이다. 또 ‘석(石)’은 ‘돌’이고, 이것은 ‘’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데, ‘’은 ‘물’과 같은 의미이다. 결국 ‘석계(石溪)’는 한자로 기록되기 이전에 ‘내’ 혹은 ‘리’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석계의 지명이 ‘시내’로 볼 수 있고, 이는 음이 ‘’, 훈이 ‘시내’라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유 ‘물’의 이두 의미를 훈과 음을 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례로 우리 말 중에 ‘시냇물’과 같은 말인 것이다. 삼계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한자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3개’를 ‘세개’가 아닌 ‘시개’ 혹은 ‘시나’라고 발음한다. 따라서 ‘三’은 ‘시’를 음차하여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삼계는 시내(마을)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마을이 위치한 곳이 시내 옆이다 보니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이후 ‘三溪’는 다시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삼(三)’은 그의 훈(訓)을 따서 ‘석’으로 불려지다가, 이후 ‘석(石)’으로 한자화 되어 석계(石溪)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삼계2마을이 속한 상북면은 685년(신문왕 5)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였을 때 삽량주의 일부였다.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삽량주가 량주로,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서는 량주는 다시 양주(梁州)로 개명되었다. 다시 고려 995년(성종 14)에 영동도에 속하게 되었고, 상세한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에는 대체적으로 경상도 혹은 경상남도에 속해 있었다. 이무렵 상·하북면일대는 상북방, 중북방, 하북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기록된 문헌은 없으나 상북면 청사는 원래 소토리 어전(현 내전마을)에, 중북면 청사는 상삼리 일부인 황산(현 상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후 1914년 행정개편 때 중북면이 상북면에 합병되었고, 이에 상북면 청사는 구 청사가 위치한 석계리로 옮겨졌다. 그 후 1992년 1월 1일부 행정 개편에 따라 석계리 삼계마을이 삼계1,2마을로 분리되었다. 현재의 삼계2마을 지역은 대부분 대규모 건설자재 공장지역이었다. 그곳에 석계교회와 삼영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약 200년 전 삼계2마을 인근 지역은 한양에서 부산으로 왕래하는 길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길손들이 쉬어 가던 봉래망과 말을 매는 마구간이 있고 주막이 몇 채 있었고, 특히 인근 지역인 상삼마을이 황산마을로 번성하였을 때는 주막이 많아서 주막거리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자연환경]
삼계2마을은 천성산 아래 위치하며, 상북면소재지와 이웃하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고속국도 1호선(일명 경부고속국도)가, 서쪽으로는 국도 35호선이 지나며 양산천이 그 옆으로 흐른다. 국도 35호선을 타고 언양 방면으로 진행하다 보면 양산 IC와 대우마리나아파트, 소석사거리를 차례로 지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 정도 직진하다 보면 석계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우회전하여 직진하다 상북파출소을 지나면 곧 마을이다.
[현황]
2007년 12월 31일 현재 380가구, 1,168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본 마을을 비롯해서 삼영아파트·동우1차아파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