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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04
영어의미역 Gimje, Home of Ink Paintings and Writings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서홍식

[개설]

전라북도 김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평야 지대로 과거 1차 산업이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에는 다른 고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풍요를 누리던 고장이다. 따라서 의식주의 풍요는 수준 높은 선비 문화로 승화되어 학문과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김제 유학(儒學)은 다른 고장과 달리 항상 서화의 흥을 동반한 선비 문화로 계승되어 직업적인 화공이 아니라 선비 출신의 서화인으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 오고 있으며. 이는 김제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더 나가서는 우리나라 서화의 맥을 형성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제의 서예 문화는 조선 중기 이계맹(李繼孟), 17세기 유집(柳緝)·송일중(宋日中), 19세기 이정직(李定稷) 등으로 맥을 이어 왔으며, 이정직의 서화 세계는 조주승(趙周昇)·송기면(宋基冕)·최규상(崔圭祥)·유영완(柳永完) 등을 거쳐 강암 송성용(宋成鏞)·아산 송하영(宋河英) 등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김제의 대표적 서화가]

1. 유집

유집[1585~1651]은 김제시 신곡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이며 자는 용여(用汝), 호는 백석(白石)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계의 추천으로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을 지낸 뒤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고 일생을 야인으로 지내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김제 지역 선비들이 유집의 덕망과 학문을 흠모하여 배움을 청하고자 모여들었으며,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시탕(侍湯)하는 제자와 세상을 떠난 후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른 이가 70여 명이었다고 전한다.

2. 송일중

송일중[1632~1717]은 김제시 두악산(斗岳山) 자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문명(文明), 호는 송재(松齋)이다. 백석 유집송일중을 한 번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창강(滄江) 조속(趙涑) 또한 송일중을 보고 장래가 크게 촉망되는 인재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창강 문하에서 학문과 서예를 익혔다.

특히 명필로 이름을 날려 전국에 많은 비문과 편액이 남아 있으며 중국에도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낸 뒤 낙향하여 오로지 학덕(學德)을 쌓는 데 힘을 쏟았다. 82세 되던 해 통정대부(通政大夫), 1715년(숙종 41)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근현대 김제의 대표적 서화가]

1. 이정직

이정직[1841~1909]은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이다. 나면서 총명하여 4세 때 『천자문』을 읽고 5세 때 주화인 엽전을 한눈에 보고 종이에 묘사하였는데 원본과 똑같아 신동으로 불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 되던 해 강회민(姜會民)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이듬해에 안정봉(安廷鳳) 문하에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산학과 예학을 두루 익히고 실학사상에 눈을 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시문과 술수(術數)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27세 때는 관직 없는 야인으로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였다. 중국 연경을 돌아본 이정직은 동서양의 문물을 보고 새로운 식견을 얻었으며, 동서양의 사상을 절충하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또한 연경에 머무는 1년 여 동안 중국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평론, 정주학과 양명학, 칸트와 베이컨 등 서양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동서양의 학문 성취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그 학문적 성과를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 등으로 묶어 냈다.

서예에 조예가 깊어 해서는 구양순체의 필법에 안진경체의 특징을 가미하기도 했으며, 행서는 동기창의 서풍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다. 화법에도 능하여 사군자와 산수는 물론 어류, 조류, 수목, 괴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괴석도」는 필법이 매우 특이하여 당대의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이정직은 김제 서예의 맥을 형성하였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함께 호남 유학을 이어 놓았으며, 학문과 인격이 뛰어나 매천(梅泉) 황현(黃玹), 해학(海鶴) 이기(李沂)와 함께 호남의 삼재(三才)로 일컬어졌다.

이정직 문하의 서예가로는 유재 송기면, 학산 정우칭, 벽하 조주승, 소강 송헌호, 이당 조병헌(趙秉憲), 석전 김연호(金然灝), 이운 나갑순(羅甲淳), 오당 강동희(姜東羲), 설송 최규상, 유하 유영완, 학헌 최승현(崔承鉉), 정로식, 정한조, 곽탁 등이 있다.

2. 조주승

조주승[1854~1903]은 옛 김제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제이며 자는 장일(章日), 호는 벽하(碧下)이다. 선천적으로 성품이 온후하였고 인품이 고결하여 청빈한 삶을 살았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유달리 서예와 문장과 묵화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다.

해서와 묵죽에 탁월하여 매천 황현석정 이정직벽하의 서화를 국유(國唯)의 솜씨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난(蘭) 그림에도 뛰어나 흥선대원군벽하를 가리켜 창란벽죽(滄蘭碧竹)이라 칭찬하였다.

조주승의 제자로는 당시 전라북도 서단을 이끌던 효산 이광열, 유당 김희순,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 등이 있다. 조주승이 남긴 작품은 금강산 유점사의 편액이 있다고 전하며, 속리산 법주사의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대나무」(작품 번호 643호)가 보존되어 있다. 매천 황현조주승을 일컬어 “송송재 이후 이창암이 있고 또한 벽하가 있어서 이로써 세 개의 솥발이 섰다. 이들이 있어 동쪽에 필원을 이루었다고 말한 것이니 호남이 적막하지 않더라.”라고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가 벽하의 출중함을 칭송하였으니 조주승의 역량을 짐작할 만하다.

3. 박규환

박규환(朴奎晥)[1868~1916]은 김제시 요촌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향집(鄕執), 호는 표원(表園)이다.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글재주가 좋았으며, 특히 서예와 사군자에 뛰어났다. 당시 석정 이정직과 같은 대가가 있어 영향을 받았고, 석정의 문하생인 벽하 조주승과 교분이 두터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박규환의 작품에는 문기(文氣)가 서려 있다.

4. 조기석

조기석[1876~1936]은 본관은 김제, 호는 심농이다. 당대의 명필로 잘 알려진 조주승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해서와 행서에 뛰어났으며, 사군자도 잘 그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創氏)를 하지 않고 머리도 자르지 않았으며, 일제의 오만방자한 꼴이 보기 싫어 세상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농담도 하지 않았으며 좀처럼 웃지도 않았다. 나라를 잃은 국민이 웃을 수 있느냐며 웃음을 주는 주변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아버지에게 배워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죽(竹)」으로 입선하였다. 생활이 어려웠으나 고향인 전라북도에서는 한 번도 작품 전시회를 하지 않았다. 전하는 작품으로 전주 ‘청학루’ 현판과 덕진공원에 있는 ‘취향정’ 현판이 있다.

5. 송기면

송기면[1882~1956]은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이며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裕齋)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별하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같은 동네에 살던 석정과 함께 간재 전우에게서 학문과 사군자를 배웠다. 즉 학문은 간재의 영향을 받았고, 사군자를 비롯한 예술적 역량은 석정에게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잠시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뜻을 접고 계화도에 은거해 있던 간재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여 근세 유학에 통달함은 물론 시·서·예·악·정경(政經)에도 심취하였다. 저술에도 힘을 기울여 후손들이 펴낸 『유재집(裕齋集)』 외에도 많은 시문이 전한다. 특히 만년에 저술한 『망언(妄言)』은 유재의 사상을 담아 낸 역저로 꼽힌다.

송기면은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탁월하여 왕희지 필법에 동기창의 장점을 더하였고, 해서는 구양순을 섭렵했으며, 전법에 능통하여 묘비문을 청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고향에 요교정사(蓼橋精舍)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일생을 통하여 노소와 귀천의 구별 없이 성실로 대하였고, 창씨개명에 절대 응하지 않았음은 물론 목숨을 걸고 일제의 통치에 반대하였다. 유재가 사망하자 유림들의 중론으로 25일장을 치렀는데 전국의 유학자가 찾아와 조의하고 200여 명의 문생들이 마지막 길을 인도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막내아들 송성용, 사손인 송하영과 송하경(宋河璟), 윤제술(尹濟述) 등 많은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6. 나갑순

나갑순[1885~1946]은 옛 김제읍 옥산리 구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이운(怡雲)이다. 일찍이 아버지에게 글공부를 배웠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름에 정성을 다하여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석정 이정직의 문하에서 깊은 학문을 익혔고, 유재 송기면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계화도에 들어가 간재 전우를 만나 학문의 폭을 더욱 넓혔다.

7. 최규상

최규상[1891~1956]은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석치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규하, 자는 백심(伯心), 호는 춘곡(春谷)이다. 전주로 이사한 뒤로는 호는 설송(雪松), 당호는 노하당주인(老霞堂主人) 또는 취묵헌주인(醉墨軒主人)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예(技藝)가 뛰어났고 일찍이 학문이 깊은 아버지 밑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자라서는 석정 이정직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군산측량학교를 졸업하고 김제군청에 잠시 근무하였고 백산면장을 지냈다.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여 제각과 정자, 편액, 정려문, 비문 등 많은 필적을 남겼다. 서예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에 두루 능하였고, 특히 전서의 대가인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을 사사하여 전서에 더욱 명성이 높았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예서 한 점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는데, 선비의 고절한 기개가 잘 표현되었다는 평을 들었다. 명리를 떠나 순수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서울이나 대전 등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열었을 뿐 거의 전라북도에 머물렀다. 전라북도의 서화가 모임인 한묵회(翰墨會) 창립에 주도적 구실을 하였고, 1946년에는 전국 서예 대가들의 모임인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8. 유영완

유영완[1892~1953]은 김제시 교동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 호는 유하(柳下)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와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20세 때 유명한 서예가 오세창(吳世昌)유하의 글씨를 보고 “장래 대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재질을 갖춘 글씨”라고 극찬하였다.

매·난·국·죽·석·송의 6군자에 능통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묵죽이다. 만년까지 외부에 발표하기 위한 작품은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외롭고 가난한 예술인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장남 동곡(東谷) 유근상(柳根相)이 대를 이었다.

9. 조병헌

조병헌[1876~1937]은 김제시 교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제, 호는 이당(彛堂)이다. 인품이 준수하고 학문이 출중하여 성균 생원에 등과하여 조경묘참봉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열중하였고 웅지를 키우고자 중국으로 건너가 4년 동안 서예 공부를 하였다. 당시 서예 대가인 윤용구(尹用求)·박수연 등과 교류하며 중국식 서법을 정석화한 필체의 행서와 초서를 연구하여 나름대로의 독특한 서법을 추구하였고 사군자를 그렸다.

10. 조송

조송(趙松)[1895~1975]은 본관은 김제, 호는 일농(一聾)이다. 초년의 호는 난석(亂石)·오죽당이라 했는데, 60대에 이르러 일농으로 고쳐 불렀다. 이는 귀가 먹어야 세속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서예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당 조병헌의 둘째 아들로 선천적으로 학문과 서예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묵란이 좋다는 평을 들었다.

11. 정복연

정복연(鄭復然)[1909~1979]은 본관은 연이, 호는 운정(雲汀)·동주산인(東洲山人)이다. 김제에서 태어나 옥구로 이사하여 살았다. 우석 황종하(黃宗河)가 지도하는 군산서화연구소에서 공부하며 서화의 기초를 배웠고, 일본의 회화 강의록 등을 받아 보면서 스스로 공부하여 회화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산수화, 화조화, 영묘화에 능하여 전라북도 지역에서 이름이 높았다. 전통적인 화풍과는 전혀 다른 화법으로 시도한 그림도 있는데 이는 기존의 사조를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시도해 보려는 것으로 보인다.

12. 김정기

김정기(金正基)[1904~1951]는 김제시 금산면 성계리 신암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언양이며 호는 난사(蘭史)·운호(雲湖)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서예를 익혔고, 4~5세부터 서예에 두각을 나타냈다.

재주를 알아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재 송기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16세에 이미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행서에 능하였고 사군자 가운데 특히 난과 죽 그림 솜씨가 일품이었다. 성품이 겸손하여 남에게 작품을 주기 꺼려하였으며, 자식에게도 단 한 폭의 유작도 물려주지 않았다.

13. 송수용

송수용(宋守鏞)[1906~1946]은 유재 송기면의 맏아들로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보(正甫), 호는 소정(韶庭)이다. 어려서부터 문필에 능한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5세에 선비의 덕행을 갖추었고, 16세에는 간재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8세에 신병으로 잠시 수양하기 위하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 무렵 한의학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직접 강습을 받아 한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았고, 한의사가 된 뒤에도 학문과 서예에 정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올곧은 정신을 지켰다. 맏아들 송하영이 송수용의 뒤를 이어 한의학과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14. 윤제술

윤제술[1904~1986]은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재(芸齋)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6세에 서당에 들어갔고, 13세에 세 살 많은 송이순(宋二順)과 결혼했으니 강암 송성용이 그의 사촌처남이 된다. 14세에 간재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이후에 심농 조기석에게 서화를 배웠다.

1920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모교인 중동학교와 보성중학교·성남중학교에서 근무하였고, 남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54년 김제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6번의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행서와 초서에 능했고, 저서로 『운재선집』 등이 있다.

15. 송성용

송성용[1913~1999]은 자는 사언(士彦), 호는 강암(剛菴)이며, 송기면의 3남이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고독한 생활을 하였고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영향 아래 요교정사에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고, 아버지와 장인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의 학문을 이어받아 18세에 처조부의 묘비를 써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청년기에 영암 월출산과 부안 개암사에서 휴양하며 학문을 넓혔고, 당대 문인화의 대가인 김용진(金容鎭)에게 사군자를 익혔으며, 김진우(金振宇)에게 서죽법(書竹法)강론을 듣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단발령에 불복하고 평생 상투와 한복을 고집했으며,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올곧은 선비의 지조를 지켰다.

1960년 성균관사성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유도회 전북본부 위원장과 성균관전학, 간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44세 되던 해 국전에 입문한 뒤 문교부장관상을 포함하여 여섯 차례 특선하여 중앙 서단에 진출하였고 비로소 강암체를 모색하였다.

1967년경 서화 연구 단체인 연묵회를 창설하여 후학을 지도하였고, 한·중·일의 서예 교류를 위하여 대만의 감람제(敢覽齊)와 오랜 교류전을 개최하였다.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선정위원을 지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전주에 사재를 털어 강암서예관(剛菴書藝館)을 세우고 후학을 위해 강암서예학술재단(剛菴書藝學術財團)을 설립하였다. 강암서예관은 평생 수집해 온 서화 작품과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1,600여 점의 소장품과 소유 재산을 전주시에 기부하여 세운 국내 최초의 서예 전문 전시관이다.

16. 나상목

나상목(羅相沐)[1924~1999]은 김제시 용동에서 나영순(羅寧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 호는 벽천(碧川)이다. 현대적 한국 산수화의 대가인 나상목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7세 때부터 서당에서 공부하였고, 10세가 되어서야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익산농림학교에 진학하였고,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학교장 추천으로 모교인 익산농림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9년 모교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화단에 입문하였고, 이듬해 6·25전쟁으로 피난 온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와의 만남은 동양화의 길을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52년 김제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955년부터 국전에 잇달아 네 차례 특선을 하여 중앙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5년부터 1993년까지 원광대학교에 재직하였고, 전북예술회관과 김제시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여 결실을 맺었다. 1998년 12월 벽천미술관 기공식을 하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우계 나기환이 대를 이어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벽경 송계일, 벽산 강현식, 구산 김승학, 철산 이정훈 등이 스승의 맥을 잇고 있다.

17. 송하영

송하영[1927~1992]은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유재 송기면의 장손이자 소정 송수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 호는 아산(我山)이다. 아버지의 훌륭한 학문과 서예를 습득하여 선비 정신을 갖춘 서예가의 면모를 갖추었고, 구양순과 안진경의 해서와 황산곡과 하소기의 행서에 능하였다.

학문 또한 사서오경은 물론 제자백가까지 두루 익혔고, 문장에도 뛰어나 한시를 비롯한 묘비명이나 제(題), 기(記) 등을 많이 지었다. ‘벽골제사적비’와 ‘춘우형선생순절추모비’, ‘삼람서원묘정비’ 등 수많은 문장과 작품을 남겼다. 김제미술협회 창립에 공헌하였고, 초대 김제미협 지부장을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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