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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17
영어의미역 The Confucian Cultural Assets in the Skirt of Seongsan Mountai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7-3 일원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승대

[개설]

김제시 교동 일대에 자리 잡은 성산(城山)은 김제시의 주산으로 해발 고도 30~41m의 야트막한 구릉 산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 약 40㎞를 관망할 수 있다. 성산 주위에는 사적 제482호인 김제군 관아와 향교, 벽성서원(碧城書院), 용암서원(龍巖書院), 홍심정(紅心亭) 등 김제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문화 유교 자산이 잘 남아 있어 김제시의 정체성을 말해 주고 있다.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 성산성지]

김제 시민의 휴식처인 교동 성산성지는 백제시대에 중요한 구실을 한 성곽이었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고, 1917년 편찬한 『김제군지』에 주성(主城)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제군지』에 따르면, 동헌을 중심으로 교동·서암동 등지를 포함한 이 성은 “석성(石城) 2,820척, 높이 20척, 토성(土城) 2,410척에 네 곳의 옹성과 6개소의 샘[泉]이 있던 이중성이라고 했는데 일제시기 초에 이르러 완전히 허물어져 증축치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천지기(天智記)」에는 백제 때의 김제가 피지산(避支山)과 피성(避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피성은 백제의 중앙 정부가 궤멸된 뒤 백제 유민들이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때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근거지이기도 하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패망한 뒤 백제의 충신이자 왕족인 복신이 왜국에 서 돌아온 부여풍을 옹립하고 주류성[지금의 부안군 우금산성으로 추정]에서 항전하였으나, 논과 밭이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는 메마른 자갈땅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662년(문무왕 2) 12월 부여풍과 신좌평·복신 등이 “주류성은 오직 전쟁을 막아 낼 장소일 뿐”이라며 피성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천지기」에는 “김제로 천도해야 할 이유로 동남쪽에 깊고 커다란 제방이 지키고 있어 좋은 지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커다란 제방이란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 이로 미루어 피성은 바로 성산성지이며,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그동안 이설이 많았던 주류성의 위치도 부안군 우금산성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피성에서 싸우던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의 압박으로 두 달 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물러갔는데, 당시 백제 부흥군은 김제를 일컬어 “삼한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고, “의식의 근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김제]

조선시대의 통치 제도는 개국 초기에는 고려 말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3대 태종 연간에 확립되었고, 세조 대에 일부 수정되었으며, 1484년(성종 15)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과 더불어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 김제 지역에 처음 나타난 행정상의 변화는 1403년(태종 3) 김제현김제군으로 승격한 일이다. 이때의 수령은 지군사(知郡事)였는데 1466년(세조 12) 행정 조치에 따라 군수로 바뀌었다.

당시 전라도에는 종2품 부윤이 전주에, 정3품 목사가 처음에 나주와 제주에 있다가 성종 때 광주에도 배치되었고, 종3품 도호부사가 남원을 비롯하여 4곳에, 종4품 군수가 김제를 비롯하여 12곳에, 종5품 현령이 금구를 비롯하여 6곳에 있었다.

조선 초기 실시된 계수관제(界首官制)에서 김제군은 전라도의 4개 계수관[전주, 남원, 나주, 장흥] 중 전주 계수관 관할이었고, 1466년 이후의 진관제(鎭管制)에서도 전주 진관에 속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진관제와 별도로 신설된 진영제(鎭營制)에서도 전라도 5영[중영: 전주, 전영: 순천, 좌영: 남원이었다가 후에 운봉으로 교체, 우영: 나주, 후영: 여산] 가운데 중영인 전주영에 속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만경현이 폐지되어 김제군에 병합되었고, 1622년에는 전주부에 이속되어 그 월경지가 되었으며, 1636년(인조 14)에 다시 만경현이 되었다. 1801년(순조 1)에는 만경현의 고군산도가 분리되어 독립 행정구역인 고군산진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면리제(面里制)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면리 편성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읍지류와 1670년(현종 11)에 발간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들 수 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김제 지역의 행정구역은 김제군 19면, 만경현 8면, 금구현 10면이다. 그 밖에 1789년(정조 13)에 발간한 『호구총수(戶口總數)』와 1864년(고종 1)에 발간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여지도서』의 기록과 거의 비슷하다.

이렇듯 김제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전라도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중심 치소인 김제군 관아의 핵심 지역인 성산 자락에는 유교 자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김제군 관아와 향교]

김제군 관아와 향교는 2007년 7월 31일 사적 제482호로 지정되었다. 김제시 교동 7-3 일원에 있으며, 면적은 65필지 15,685㎡이다.

1. 문화재적 가치

김제는 삼국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하여,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에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 중요한 정치 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郡)으로서 격이 비교적 높았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은 그에 따른 위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김제 관아는 조선시대 당시의 건물인 동헌·내아·피금각(披襟閣)·관리사 등이 남아 있고,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은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등이 남아 있다. 명륜당과 만화루는 비록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나 향교 건축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관아과 향교가 서로 가까운 거리[약 130m]에 보존되고 있어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관아의 경우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

2. 김제동헌

197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이 공무를 수행하던 건물로 1667년(현종 8) 처음 지었고, 1699년(숙종 25)에 수리하였다.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오른쪽 6칸에 대청이 있고 왼쪽 4칸은 온돌방이다.

외벽은 사방에 같은 형태의 문이 달려 있으며, 앞면 가운데 1칸과 뒷면 왼쪽에 출입문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앞면을 7칸으로 꾸며 위엄 있는 건축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앞뒤에 퇴가 있었고 내부 양쪽 좌우에 온돌방이 있었는데, 근년에 읍사무소로 이용하면서 변형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보수하였다.

3. 김제내아

197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김제 지역에 부임한 관리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내아는 살림집이다. 1667년 동헌과 함께 지은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지금 남아 있는 ㄷ자형의 안채 외에도 부속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는 유일한 건물이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상류층의 주택 구조를 잘 보여 주는 건물로 전체적으로 간결한 모습이며, 기둥과 보 등의 짜임새로 보아 견실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1981년 복원·보수하여 보존하고 있다.

내아에 있는 정자인 교동 피금각은 김제군수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일반적인 정자 형태와는 조금 다르게 겨울철 난방까지 고려하여 가운데에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방을 두었고 정자 아래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도록 되어 있다.

4. 김제향교

2007년 김제군 관아와 함께 사적 제482호로 지정되었다. 1404년(태종 4) 설립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35년(인조 13)에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수리하였다. 김제 지역에는 김제향교 외에도 금구향교, 만경향교가 있다.

김제향교의 시설로는 배향 공간인 대성전, 교육 공간인 명륜당, 행랑인 동무, 유생들의 숙식소인 서무,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성산 기슭 비탈진 곳에 조성되어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배향 공간인 대성전보다 앞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하고 있다.

향교의 출입문은 외삼문과 내삼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 풍속과 교화한다는 의미의 풍화루, 만물과 교화한다는 만화루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밖에 부속 건물로 교직사, 경판고, 제기고, 양사재, 흥학재, 사마재, 육영재, 향숙당, 계성사 등이 있다.

향교 정문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홍살문 앞 오른쪽에 하마비가 있다. 홍살문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나 왕릉·궁궐 등 신성 지역을 알리는 표시물이며, 하마비는 궁궐·종묘·문묘, 성현들의 탄생지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하는 표석이다.

일반적으로 향교 앞이나 향교 안에는 여러 기의 비석이 있다. 그 지역을 다스렸던 관찰사나 목사·군수·현감·현령 등을 기리는 선정비·송덕비·불망비 와 향교 건물의 중수기, 교임들의 공적 기념비들이다. 김제향교에는 8기의 비석이 있다.

5. 김제향교 대성전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제시 교동 39번지[향교길 89-3]에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앞면에 사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과 옆이 트인 퇴칸을 두었고 몸채 쪽에는 문을 달았다. 가운데 칸 중앙에 두 짝의 문을 달고 양쪽 기둥에는 골판 벽을 끼웠다. 양끝 칸에는 한 짝씩 문을 달고 그 옆 공간에도 골판 벽을 끼워 특이한 앞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양끝에 있는 기둥에는 건물 옆면 쪽으로 지겟다리 모양의 굽은 버팀목을 기둥 중간에 박았는데, 그 형태가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제272호]과 같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성산 자락의 서원과 홍심정]

성산 자락에는 김제군 관아와 향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 자산인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서원으로 용암서원벽성서원이 있다.

1. 용암서원

김제시 교동 38-2번지에 있다. 김제향교 인근 성산공원으로 가는 길에 자리한 용암서원은 1488년(성종 19) 창건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575년(선조 8) 중건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에 성산 아래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사당과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제조씨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을 주벽으로 하여 문평공(文平公), 묵암(墨岩) 이계맹(李繼孟), 귀산(龜山) 나응삼(羅應參), 윤농은(尹農隱), 나건계(羅建溪), 이귀천(李龜川), 백천당(百千堂), 조윤침(趙潤琛) 등을 배향하였다.

2. 벽성서원

김제시 교동 38번지에 있다. 1965년 김해김씨(金海金氏) 종친들이 세웠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사당과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유신(金庾信)을 주벽으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죽강(竹岡) 김보(金普), 도산(陶山) 김선(金璇),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 숙재 허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갑봉(甲捧) 김우항(金宇杭) 등을 배향하였다. 봄가을 두 차례 제사 지낸다.

3. 홍심정

홍심정은 1789년(정조 13) 밖으로는 외적을 막고 안으로는 무사도 정신을 수련할 목적으로 성산공원 북쪽 언덕에 활터를 마련하면서 지은 정자이다. 1820년(순조 20) 장소가 너무 좁아 읍내 서변면 옥거리[지금의 옥산동]로 옮겼고, 1826년(순조 26) 읍내 서변면 사정거리[지금의 요촌동]에 활터와 정자를 새로 지었다. 1920년 영홍정(寧紅亭)이라는 이름을 홍심정으로 바꾸었고, 1978년 성산 서쪽에 활터와 정자를 새로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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