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동학농민군 원평취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85
한자 東學農民軍院坪聚會
영어의미역 Wonpyeong Rally of Donghak Peasant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집회
발생(시작)연도/일시 1893년 3월 21일 이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3년 4월 5일 무렵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전봉준(全琫準)|서장옥(徐長玉)|김문현(金文鉉)|남접(南接)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외세에 반대하고 탐관오리를 축출하기 위해 동학 남접(南接)의 주도 하에 진행된 집회.

[역사적 배경]

개항과 더불어 농촌 경제가 점점 파탄 지경에 달했고, 지방관과 토호들의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한편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崔濟愚)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하고,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탄압으로 매우 힘든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최제우 사후 최시형이 교단을 정비하였다.

최시형최제우가 억울하게 죄를 입고 죽었음을 호소하며 동학 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그런데 공주와 삼례에서 벌인 집회 뒤에도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고, 동학 지도부의 성급한 해산 결정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일부 교도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게다가 당시의 조선 정세는 교조 신원 운동을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운동을 요구하였다. 1860년대 이래 계속되었던 민란의 경험을 통해 농민들은 전국적 봉기를 통해 지배 정권을 타도하고 외국 세력을 축출해야만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동학 조직이 농민 봉기를 가능하게 해줄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동학에 적극적으로 입교하였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동학교도들은 혹심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농민운동 지도자들의 운동 노선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에 동학교도들의 운동도 1893년에 열린 보은취회를 전후하여 정치 개혁 및 척왜양(斥倭洋)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목적]

동학농민군 원평취회에서는 북접이 중심되어 내세운 교조신원(敎祖伸寃)의 종교적 주장보다도 백성들의 현실적·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교조 신원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동학교도들이 집결하여 벌이려 했던 보은취회의 성격을 종교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발단]

삼례집회 후 북접이 주도한 광화문 복합 상소(伏閤上疏)가 1893년(고종 30) 2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복합 상소 3일 만에 고종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다면 마땅히 소원대로 시행하겠다.”는 비답(批答)을 내려 해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해산 후 정부는 상소를 올린 주모자를 체포하게 하였고, 동학교도를 막지 못한 전라감사와 한성부판윤을 문책하였다. 정부가 동학에 대한 강경책을 쓰자 지방관들의 동학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처럼 삼례집회 및 복합 상소 운동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냉담했고, 동학 지도부의 성급한 해산 결정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일부 교도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졌다.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에 동학 지도부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교조 신원 운동 벌이기를 포기하고 대중 집회를 본격적으로 벌였다. 3월 10일에 동학 지도부는 전국의 교도들에게 보은 장내리에 집합하도록 명령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2만여 명의 교도가 집결하였다. 이때 전라도 금구(金溝)에서는 전라도의 동학교도들이 보은취회에 집결하기 전에 따로 집회를 가졌다. 원평은 전주와 정읍, 태인 등 주변의 고을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동학 남접(南接)의 중심적인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평에는 전봉준의 지인들이 많았고, 금구 대접주 김덕명전봉준의 외가 친척이었다.

[경과]

당시 전라북도 금구군 수류면 원평리[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남접의 서장옥(徐長玉)·손화중(孫華中)·전봉준(全琫準) 등 현실 저항적 성향이 강하던 교도들이 주도하여 원평취회가 이루어졌다. 이 집회에 관한 기록이 적어 자세한 정황을 알기는 어려우나 원평취회의 주도자들은 일단 전라도 지역에서 보은취회에 참가하려던 동학교도들의 중간 집결지로 원평을 선택하고, 교도를 모으고 무기와 식량을 모아 북상하여 보은취회에 합세한 뒤 서울·인천으로 올라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실천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원평취회는 동학의 이전 집회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정치적 성격을 나타내었다. 무엇보다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척왜양을 투쟁 목표로 확립하고, 전라감사에게 민소(民疏)하였고, 전국 각지에 그 뜻을 담은 격문을 보냈다. 늦어도 3월 21일 이전부터 취회의 장소였던 원평장터에는 약 1만 명의 동학 농민들이 모여 고부접주 전봉준과 금구접주 김덕명 등의 지도로 봉건 왕조의 무능·부패와 외세를 반대하는 정치적 성격의 집단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조정에서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을 보은으로 급파해 동학교도를 위무하였고, 동학 지도부는 선무사의 효유(曉諭)를 받아들여 4월 3일에 해산하였다. 보은취회가 해산되자 원평에 모여 있다가 보은으로 집결하려던 원평취회 참가자들은 목적지가 사라짐에 따라 뒤이어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군 원평취회의 주동 인물들이 기존의 동학 지도부와 완전히 다른 노선과 목표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원평취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이후에도 선도적인 투쟁성을 보였으며, 이듬해 동학 농민의 봉기를 혁명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동학농민군 원평취회는 이전까지의 교조 신원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치적 집회였으며, 1894년에 벌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의 전조가 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