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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245
한자 崔和旌閭
영어의미역 Jeongryeo of Choe Hwa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582[낙산3길 117-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솟을대문 정려각
건립시기/일시 1822년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582[낙산3길 117-8]지도보기
소유자 최남규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최화의 정려.

[개설]

학은(學隱) 최화(崔和)는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어른같이 하면서 부모님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어느 날 최화는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한밤중에 10리나 떨어진 깊고 깊은 산중에 있는 의원에게 약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때는 겨울이라 눈과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와 눈앞을 가리는데, 도중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최화가 두려워하지 않고 호랑이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호랑이가 알았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길을 비켜 주었다. 그 후 밤에 호랑이가 그 길목에 나타나는 일이 없어 사람들이 호랑이도 효자는 알아본다고 입을 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최화는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하루에 세 번씩 아버지의 묘를 찾아가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문안을 올렸는데, 그 정성은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사는 것보다 더했다.

한번은 병으로 몸져누운 어머니가 미나리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한겨울이라 어디서 미나리를 구해야 할지 막막했으나, 부엌의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서 갑자기 미나리 한 포기가 자라나 그것으로 어머니의 입맛을 살렸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집 앞에 엎드려 문안을 올리는데, 두 무릎이 닿는 곳이 움푹하게 패였다고 한다. 순조 때에 이러한 효행을 기려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위치]

김제에서 이서를 거쳐 전주 가는 방향으로 약 11.4㎞ 가면 애통리에 있는 사거리검문소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약 450m 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분토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둔산[일명 서둔]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 길로 접어들어 약 2.1㎞ 가면 전주최씨 집성촌인 서둔산마을이 나온다. 최화 정려는 서둔산마을 가운데에 있는 최남규의 집 앞에 위치한다. 정문 옆으로 자그만 산이 이어져 있는데, 여기에 옛날 당산나무로 사용했던 노송이 자라고 있다.

[변천]

정려비에 있는 ‘효자최화지려임오구월’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1822년(순조 22)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들 때는 주춧돌을 놓고 정려각을 지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계단을 시멘트로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을 만들어 사면을 홍살로 둘렀다. 솟을대문 정려각 중앙에는 최식(崔湜)의 정려가 있고, 왼쪽에는 애일당 최응삼(崔應三), 오른쪽에는 최화의 정려를 모시고 있다. 최석헌(崔錫憲)이 최응삼 정려 옆에 ‘애일당’이란 편액을 만들어 붙여 놓았고, 최화 정려 옆에는 ‘학은재(學隱齋)’라는 편액을 써서 붙였다.

[의의와 평가]

전주최씨 도사공파들이 김제 금구 지역에 살면서 효자와 열녀를 많이 배출하여 지역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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