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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202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감옥 같은 생활을 하다]

이민자들의 광활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 이어졌다. 광활면의 9개 답구에는 각 답구를 관활할 답구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9개의 답구장, 답구를 관할하는 3농구의 농구장, 그리고 한 명의 지배인이 있는 구조였다. 이민자들은 공동 경작과 타작은 물론 각종 노동에 강제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는 답구장의 위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

답구장은 일본인들이 선정했는데, 주로 일본인들의 지시를 전달하는 일을 주로 했다. 지금의 군수 정도의 위치로 권한이 좋았기 때문에 당시 답구장이 되면 출세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답구장은 정부에서 고무신과 옥수수가루, 밀가루, 설탕과 같은 것을 보급할 때 우선적으로 배급받을 수 있었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죽어라 일했지]

이민 온 사람들에게 배정된 한 가구당 다섯 필지 논은 두 사람이 경작하기에는 버거운 양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도 끝내기가 어려웠지만 마을을 떠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일본 관리들의 핍박이 아닌 이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몸이 아파도 논 위에서 앓아야 했다. 아이를 낳은 산모도 사흘이면 일터에 나왔다. 감독관의 회초리로 맞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며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일본의 착취 속에서 아베농장의 노예로 시달리는 소작인들은 점점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현재 답구장에 항거한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임영춘은 현지 조사를 통해 답구장에 항거한 내용을 그의 소설 『갯들』에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들이 노예도 아니고 사람인데 떳떳하게 할 소리는 하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주민들의 생사를 걸고 지배인에게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소작료를 낮춰 주는 것과 공동 타작일의 반대였다. 각 답구를 돌면서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지배인의 집에 쫓아가서 시위할 양이었다. 한 해 농사를 지어도 빚이 줄기는커녕 계속 불어만 가는 것이 태반이었던 사람들은 이내 뜻을 함께하겠다고 하였고, 지지자는 백여 명이 넘어섰다.

지배인의 사무실로 까맣게 쫓아가 그들의 요구를 소리 높여 외쳤다. 지배인도 노예 부리듯 부려먹었던 사람들이 몰려와 항의를 하니 모조리 추방시키고 싶었지만 혼자 당하지 못할 많은 사람들을 보니 막상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그는 소원대로 들어 주겠다는 각서를 써 줄 테니 각 답구의 대표들이 누군지 이름을 밝히라고 했다. 미심쩍긴 했지만 누군지 알아야 뜻을 들어 주겠다는 각서를 써 줄 거 아니냐는 지배인의 말에 모두들 이름을 적었다.

다음날이었다. 이름이 적힌 사람은 모조리 추방 명령이 내렸다. 알몸뚱이로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게 된 것이다. 사무원들과 칼을 찬 순사까지 집 앞으로 나와 지키고 서 있었다. 조금씩 넣었던 집값이고 뭐고 한 푼도 주지 않은 채 모반자로 몰려 순사에게 죽도록 매를 맞고 쫓겨 나가게 된 것이다.

위 내용에 대해 화양마을 주민들은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으나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화양마을은 당시 5답구에 속했는데, 당시 답구장에 항거했던 사람은 다른 답구 사람들인데다 답구장에게 항거하던 사람들이 농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당시 답구장은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결국 이민자들을 함부로 대한 답구장은 해방 후 마을 사람들에게 몽둥이질을 당하거나 괄시를 받고 쫓겨났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핍박할 때 도와줘야 할 동포가 상대편에 서서 돕고 있으니 좋게 보였을 리 없었다.

[정보제공]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 •  송수철(남, 1936년생, 옥포리 광활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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