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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204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광활방조제가 터지면서 큰 수해 피해가 났던 때는, 한국전쟁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봇짐을 들고 피난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민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 역시 팔도에서 이민을 통해 들어온 각성받이들이기에 거주민, 이주민을 구분하지 않았다. 급하게 피난을 온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생필품과 식량을 나눠 주면서 동네 사람으로, 이웃사촌으로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당시 피난민들은 왜정 때 농장을 관리를 위해 일본인이 지어 둔 합숙소를 고쳐서 살았다.

그 후 정부는 피난민들을 위해 11칸으로 나뉜 일(一)자 형태의 집 두 채를 지었고, 이곳에서 22가구가 거주하게 되었다.

[먹을 게 부족해서 싸웠지]

피난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은 물질을 하는 것이었다. 갯지렁이, 굴, 맛, 조개 등을 갯벌에서 잡았고, 여덟 팔(八)자 모양의 ‘내리미’라는 그물을 이용하여 새우나 게를 잡아서 팔았다. 덕분에 바다에서의 벌이는 다른 지역에서 농사를 하고 지내는 것의 두 배였다. 어떤 이는 석유통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호롱불을 피우는 마을 사람에게 조금씩 파는 장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처지의 세 집단이 마냥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김제 월촌 명덕리에서 아버지를 따라 6답구로 이주했던 조용환 씨는 당시를 ‘몽둥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로 기억했다. 피난 온 사람들이 상당히 거칠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옥수수가루, 밀가루, 농기구와 같은 생필품이 배급되는 날이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배급되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수해민 대표와 피난민 대표가 자주 싸웠다. 당시 청년단장이었던 조용환 씨가 이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모든 것이 각자의 생존경쟁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쉽게 해결이 나지 않고 통솔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화양1구에는 마을의 수해민,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 그리고 기존의 마을 거주민들까지 총 50가구 정도가 살았다.

합숙소나 수용소에서 오랜 생활을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갔다. 피난민들은 물질을 해서 모은 돈으로 마을 밖에 집을 얻어 모두 나갔고, 수해민들 중 대부분은 현지에 남아 땅을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일부는 어려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타지로 나갔다. 그러나 그 후로도 화양1구의 한 지붕 세 가족생활은 10년 남짓 유지되었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 •  최성진(남, 1936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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