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961
한자 黃金彩
영어공식명칭 Hwang Gumcha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3월 28일연표보기 - 황금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 - 황금채 부여군 임천면에서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황금채 공주지방법원에서 황금채에게 태 60도를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49년 6월 28일연표보기 - 황금채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8년연표보기 - 황금채 대통령 표창 수훈
출생지 비정리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비정리 지도보기
활동지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황금채(黃金彩)[1889~1949]는 1889년 3월 28일 부여군 임천면 비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5일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무쇠점마을에 있던 박용화(朴容和)의 집에서 부여 지역 내 전·현직 천도교 간부였던 황우경(黃宇京)·박성요(朴性堯)·최용철(崔容澈)·정판동(鄭判同)·문재동(文載東) 등과 함께 합숙하며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황금채 등은 3월 6일 새벽에 팔충리를 출발하여 오전 7시 무렵 임천면 구교리에 도착한 뒤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장터 등 인파가 많은 곳에서 3·1 운동의 정당성과 시위 동참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오전 10시 무렵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등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천 헌병출장소 앞에서도 만세 시위를 이어 가다가 황금채는 시위를 주도하였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황금채는 1919년 4월 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60도를 선고받았다. 황금채는 1949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황금채의 공적을 기려 201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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