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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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이칭/별칭 | 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근대 개항기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전국적인 농민운동 중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전개된 운동.
[개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왔던 청(淸)나라의 몰락과 함께 밀어닥친 제국주의 열강의 강압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각종 민란(民亂)의 발생으로 인해 조선 중앙정부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여 국가 보위와 농민 구제의 성격을 지니면서 폭넓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동학농민운동은 처음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으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민란과 결합하게 되면서 점차 정치운동으로까지 비화하였다.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도 당시의 동학교도들의 창원 방문, 동학당이 창원에 모여 있다고 조정에 올린 상계, 창원 동학교도의 명단 등과 관련되는 자료를 통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민요가 발생했을 것으로 어느 정도 추정할 수는 있으나 그 구체적인 활동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다한 부과 등으로 농민들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밖으로는 외국 세력의 침투에 따라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었고, 안으로는 농민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각종 민란까지 발생하였다. 이미 16~17세기 임술(壬戌, 1562) 임꺽정(林巨正事), 정축(丁丑) 장길산사(張吉山事) 등의 민중운동(民衆運動)이 농민계층의 각성으로 이어졌고 고종 대에 와서는 26회에 달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농민계층 속에서도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다. 신흥종교인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단순한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개혁 욕구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사회개혁의 요구와 외국세력의 배척을 주도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여 전국 각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도 이와 관련한 민요가 발생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과]
1894년 6월말 이후 호남 동학군들이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남도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이 지역 동학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7월과 8월 영남 지역에서도 민란이 속출하면서 농민들의 분위기는 계속 고조된 반면 관은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창원 지역의 경우 동학도의 활동이나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구체적인 사례의 내용을 담은 기록은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당시 창원 지역에서의 동학도 활동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1894년 7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 두 명의 동학도가 경남 지역 각 읍을 순행하다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들이 다녀간 읍과 관서에 창원(7월 29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1894년 9월 25일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이항의(李恒儀)가 동학당이 창원 등지에 모여 있다는 장계(狀啓)를 의정부에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창원 지역에도 동학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천도교 측 자료에서도 동학교도 중 창원 지역의 인물로 김치엽(金致燁)과 대산면 구술리의 이재상(李在詳)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창원 지역에도 동학이 전파되었고 따라서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시점에 창원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