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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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碑 |
영어의미역 | Tombstone of Bowolleunggong Top to Great Priest Jingyeong in Bongnimsa Temple |
이칭/별칭 | 진경대사비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상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보물 제36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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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보물 재지정 |
성격 | 탑비 |
건립시기/일시 | 통일신라시대 |
관련인물 | 심희 |
재질 | 화강암 |
높이 | 337㎝ |
너비 | 101㎝ |
소재지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소유자 | 국가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진경대사 심희의 생애를 기록한 탑비.
[개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는 원감(圓鑑) 현욱(玄昱)의 심인(心印)을 받은 제자로, 광주·설악·명주 등지를 두루 순력한 후 김해 호족 김인광(金仁匡)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를 중창하였다. 봉림사에 머무는 동안 경명왕의 초청으로 왕궁에 들어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방법[理國安民之術]’을 설하여 왕으로부터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받기도 하였다. 진경(眞鏡)은 그가 입적한 후 경명왕이 내린 시호이며, 보월능공(寶月凌空)은 탑명이다.
[위치]
원래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에 있던 것을 1919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 내로 옮겨졌고, 그 후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형태]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로는 뿔이 있던 작은 구멍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하였는데,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비문이 새겨진 비몸은 망실된 부분이 있어 옛 탁본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둘러싸인 두 마리 용이 모퉁이에 각 한 마리씩 표현되어 있다. 몸돌 밑면에 탈락, 결실 부분이 있어 전체 내용을 판독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전문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려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높이는 337㎝, 비신 높이 183㎝, 너비 101㎝이다. 총 33행에 담긴 비문의 내용은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금석문]
비문은 주인공인 심희(審希)가 입적한 후 제자들이 작성한 행장(行狀)에 의해 왕이 직접 지었다.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비문의 본문 내용은 총 33행으로, 글자 수는 1,780여 자에 이른다.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내용은 크게 ① 출생에서 출가 이전까지의 모습, ② 현욱의 제자가 되고 그의 법을 이은 제자[嗣法弟子]가 되는 내용, ③ 송계에서 설악, 명주에 이르기까지 순유(巡遊) 수행과 진성왕의 부름을 받는 내용, ④ 봉림사의 중창과 교화 활동에 대한 내용, ⑤ 입적과 승탑을 세우기까지의 과정 등이 포함되고 있다. 문하승인 행기(幸期)가 글씨를, 전액(篆額)은 최인연(崔仁渷)이 썼다. 글자를 새긴 사람은 문하승 성림(性林)이다.
[현황]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함께 봉림사지에 있었다. 원래 비가 서 있던 자리에는 조선총독부가 세운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지(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址)’라는 글을 새긴 이건 표석이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6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