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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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審希 |
영어음역 | Sim Hui |
이칭/별칭 | 진경대사(眞鏡大師)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통일신라시대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가계]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에 따르면, 심희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이라 하였다.
[활동사항]
심희는 신라 하대에 중앙 중심의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어 가던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심희는 9세 때 혜목산에 가서 현욱(玄昱)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 후의 활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한 운수기(雲水期)와 봉림사(鳳林寺)에 주석하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심희는 운수기에 광주(光州)·설악(雪岳)·명주(溟州)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수행하였는데, 머문 곳은 반신라(反新羅)의 정서가 팽배한 곳이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심희는 신라 진성왕(眞聖王)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선승들이 모여들었다. 지역민에게는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든 사람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 것과 같았다고 한다.
심희는 재지 세력들의 후원을 받아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봉림사를 개창한 이후 어느 시기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신라 경명왕의 초빙에 응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설파하였다. 그런가 하면 많은 제자를 길러서 봉림선당(鳳林禪堂)에서 입적할 때 모인 제자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심희의 활동에 힘입어 봉림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심희의 사상은 공유(空有)에 치우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 현실의 상황도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