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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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鄕校 |
영어의미역 | Changwon County School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433-2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태성 |
성격 | 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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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목조기와건축물 |
건립시기/일시 | 1749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4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433-2 |
소유자 | 한국유도회 경남지부 창원지회 |
관리자 | 한국유도회 경남지부 창원지회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
문화재 지정일 | 1974년 12월 28일 - 창원 향교 대성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에 있는 조선 전기 지방 교육기관.
[개설]
창원 향교는 지방의 교육기관이지만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문묘(文廟),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 및 중국과 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 서무(西廡)와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다. 향교는 각 지방 관청의 관할 하에 두어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하였다.
[위치]
창원 향교는 현재 창원 읍성 동문지 동쪽에 위치해 있다.
[변천]
창원 향교의 최초 창건은 조선 전기 태종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를 처음으로 옮겨 지은 곳은 1482년(성종 13)에 현 경상남도 마산시 합성동 시외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합포성 뒤편 청룡산 아래이다. 이 합포성이 읍성으로서의 역할이 부적합하여 성을 현재 창원시 의창동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다시 향교를 옮기게 된다.
1705년(숙종 31)에는 부사(府使) 신명식이 도감 박태윤과 함께 우선 창원향교를 천주산 아래 50보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현재의 위치로 향교로 옮긴 것은 1748년(영조 25)에 부(府) 동쪽 태을산(太乙山) 아래의 남향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터를 정하고 부사 이윤덕이 공론을 모아 1749년 정월에 이건하였다. 이처럼 대개 향교를 옮기는 시기는 읍성이 옮겨질 때나 읍(邑)의 치소(治所)가 이동할 때이다.
창원 향교에는 대성전을 지을 때의 상량문과 향교를 창원 지역으로 옮길 때의 일을 기록한 「이교서(移校序)」, 향교를 중수할 때 쓴 「향교중수기」 등이 있다. 그 중 향교가 옮겨진 과정을 자세히 소개한 정한걸(鄭漢杰)의 「이교서」는 옮겨진 날짜와 공역에 참가한 사람 등을 잘 드러내었다. 즉 원래 합성동 동쪽 청룡산 아래에 있던 향교를 창원 의창동으로 옮기고 다시 그곳의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판단하여 현재의 창원 향교 자리로 옮기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본래 옛날 향교는 지금 교궁(校宮)의 오십 보에 있었는데 지난 을유년(乙酉年)에 읍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어서 먼저 부의 서쪽 십오 리 청룡산 아래로 향교부터 옮기게 되었다. (중략) 무진(戊辰)에 남태양(南泰良) 공이 안절사(按節使)로 본도를 살필 때 부사 이운덕(李潤德)이 부를 맡고 있었다. 창원부의 여러 사람이 향교를 옮기는 일을 안절사에게 고하니 이에 남공이 다른 날 내가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중략) 드디어 영문(營門)에 낱낱이 고하니 유생(儒生) 조대연(曺大淵), 이의복(李義福) 등이 그 고한 것에 따라 장계를 만들어 실제 보고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부사는 읍민들에게 말하였다. ‘안절사가 이미 보아서 알았고 조만간에 사당을 옮겨야 할 것이니 공역을 시작할 것이면 늦출 일이 아니다.’
이에 읍에서 촉망받는 사람들을 뽑았다. 노세완(盧世琬)을 터를 잡는 유사로 삼고 노세환(盧世煥)을 조성하는 일의 도감(都監)으로 하고, 안성집(安聖輯)은 재물을 관리하는 장재(掌財)로, 김진환(金震桓)·김장대(金章大)가 동역(董役)이 되고 나와 조대연(曺大淵)·김광정(金光鼎)이 교임(校任)과 앙장(鞅掌)을 맡았다. 태을산 아래 감(坎)자 기슭에 오(午) 방향에 터를 정하니 무진년(戊辰年) 12월이다.
이 달 초 8일에 향축(香祝)이 경사(京師)에서 내려왔다. 17일 객사(客舍)와 동헌을 옮기고 다음 해인 기사년(己巳年) 정월(正月) 초7일 인일(人日)에 기둥을 세우고 9일에 상량을 하였다. 부사가 돈 수백 꾸러미를 내어서 성묘(聖廟)의 터와 담장 바깥의 논 여덟 말 지기를 사서 주었다.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부사는 무릉(武陵)으로 가고 태수 유일장(柳一章)이 관직을 겸하여 왔는데 동역(董役)에 성심을 다하고 또 유학을 귀중히 여기는 절실한 뜻이 있었다. 2월 초에 원래 부사가 돌아오고 3월 3일에 위패를 모셔 안치하고 온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서 낙성을 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지어진 창원 향교는 현재의 자리에서 몇 번의 중수를 하였다. 김종기(金宗琪)가 지은 「향교중수기」는 몇 번의 중수 중에서 상직현(尙稷鉉)이 부사로 왔을 때, 김경우(金敬宇)와 그의 숙부인 김원두(金元斗)가 기금을 내어 창원 향교를 중수하게 된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형태]
조선 시대에 지어진 목조기와 건축물로, 그 중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풍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유학을 주도했던 향교는 국가의 교육기관으로서, 그리고 지방의 유림들을 통합하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지금 창원 향교의 건물과 형태는 조선시대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주사 대웅전과 불곡사 일주문을 제외하면 창원 지역에서 조선 시대 건축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들로서 교육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