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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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경상북도 구미시의 역사.
[개설]
구미 지역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선산과 인동이 중요한 행정구역이었다. 선산은 삼국시대부터 일선, 숭선, 선주로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선산군으로 개명되었고 2년 뒤 선산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인동은 삼국시대에 사동화로 불렸고, 1604년(선조 37)에 인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1978년 인동면이 구미읍과 통합되어 구미시로 승격되면서 선산군으로부터 독립되었고, 1995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미시와 선산군이 재통합되어 오늘날의 구미시가 되었다.
[고대]
1. 선산
선산 지역에서는 초기 국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각축장이 되었다가 점차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어 일선군(一善郡)이 설치되었다. 일선군은 614년(진평왕 36)에 사벌(沙伐: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과 감문(甘文: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있던 상주(上州)의 주치소(州治所)가 이동해 오면서 일선주(一善州)로 개편되었다.
삼국통일 후인 687년(신문왕 7)에 상주가 사벌주로 옮겨가 일선주는 폐지되었고,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 일선군은 숭선군(嵩善郡)으로 개칭되어 군위현(軍威縣)·효령현(孝靈縣)·이동혜현(爾同兮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일선군의 모례(毛禮)의 집에 눌지왕 때에는 묵호자(墨胡子)가, 소지왕 때에는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이곳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907년(효공왕 11) 견훤이 일선군과 그 남쪽 10여 성을 점령한 이래 후백제 영역으로 들어감으로서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 인동
인동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하였는데, 진한의 12개 소국 가운데 군미국(軍彌國)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미국은 검성골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구미시 황상동 일대의 평원 지대에까지 영역을 넓혀 나갔을 것이나 5세기경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하여 위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4세기경 신라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사동화현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경덕왕 때 수동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1. 선산
936년(태조 19) 후백제와 고려의 군대가 선산읍 동쪽 일리천(一利川)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여기서 승리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당시 이곳의 호족 김선궁(金宣弓)이 왕건에게 귀부하여 큰 공을 세워 중용되었고, 이후 그의 후예들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선주(善州)로 개편되어 자사(刺史)가 임명되었으나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 일선현으로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어 해평군·군위현·효령현·부계현을 속현으로 거느리다가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되었다.
2. 인동
이 지역은 고려 때 인주목(仁州牧)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 인동(仁同)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동현의 동쪽에 있었던 옥산(玉山)에서 따서 별호를 옥산이라고도 하였다.
인동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어 고려 말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1390년(공양왕 2)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독립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약목현(若木縣)을 편입시켰다. 1235년(고종 22) 이유정(李裕貞)이 해평에서 몽고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했고, 1380년(우왕 6)과 1383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아 크게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1. 선산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선주는 선산군으로 개명되었다. 선산군은 2년 뒤 주민이 1,000호 이상이 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에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23부제가 실시되자, 선산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가, 다음 해에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3등군으로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이래 선산김씨·해평윤씨·인동장씨가 명문으로 등장했고, 길재(吉再)의 성리학이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영남의 인재 가운데 반은 일선에 있다(嶺南人才 半在一善)”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장현광(張顯光)과 같은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다.
2. 인동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인동현은 현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군수·현감이 파견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때 곽재우(郭再祐)가 축조했다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조방장을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하던 인동이 도호부라는 높은 품계를 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소관의 인동군이 되었고, 다음 해에 경상북도 소관의 인동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칠곡군에 편입되었다.
당시 선산과 인동의 토지는 선산 지역이 비옥한 반면 인동 지역은 비옥·척박이 반반이며, 풍속은 선산은 화려하고 학문을 좋아한 반면 인동은 검솔하고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호구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선산은 809호 9,136인, 인동은 320호 2,301인이었다고 한다.
[근대]
1895년 지방제도 개편 때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23부제가 실시되자 선산도호부에 선산군·인동군이 설치되었으며, 선산군은 대구부에 속하였다. 1896년에는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3등군으로서 경상북도 선산군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인동군이 폐지되고 인동군 관할의 9개면 읍내면·북면·동면·장곡면·문량면·석적면·북삼면·약목면·기산면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한 달 뒤인 1914년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병합하여 인동면이라 개칭하고, 같은 해 7월 15일 인동면 중동 일부가 선산군 산동면 성수동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내면의 교촌리·역촌리·조남리 등 6개 리, 독동면의 신기리·독동리·원당리 등 5개 리, 무래면의 내동리·고압리 등 5개 리, 고남면 일부, 개령군 고성면 일부를 병합해 선산면이 되었다. 고아면은 본래 선산군 지역으로 망장면(網障面)이라 하여 예곡리·강정리·관심리·신화리·오로리 등 2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성면의 항곡리·모하리·봉계리·송림리·다식리 등 18개 리와 내서면의 봉산리를 병합해 옛 고아부곡(高牙部曲)의 이름을 따서 고아면이 되었다.
[현대]
1963년 구미면이 구미읍으로 승격된 후 1969년 구미공업단지의 조성으로 당시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기지로 발전하였으며, 이어 인접 군과 행정구역의 조정이 있었다. 1973년 7월 1일 칠곡군 북삼면 낙계동이 구미읍에 편입되고 산동면 도산동이 군위군 소보면에 편입되었다. 인동은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출장소의 관할로 되었다. 1978년에는 2월 15일 법률 제301호에 의거, 구미읍과 인동면을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하면서 선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당시 선산읍의 면적은 484.39㎢, 인구는 6만 6317명이었으며, 1개 면 97개 리가 있었으며, 군청 소재지는 선산읍 동부리였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에 의거, 선산군은 구미시에 통합되어 오늘날의 구미시가 되었다. 지금은 선산읍이라는 행정 지명이 있다. 1997년 11월 1일에는 고아면이 고아읍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