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26
한자 海南地方五一八民主化運動
영어공식명칭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in Haena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0년 05월 21일연표보기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80년 05월 24일연표보기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해남읍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대치가 해소되면서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80년 05월 21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오후 2시 30분 무렵 광주에서 온 시위버스 한 대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도착하여 광주의 참상을 알림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1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해남군민들이 성토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1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오후 7시 무렵 시위대 해남읍-삼산면-화산면-현산면-북평면-송지면-완도읍으로 시위를 이어감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2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새벽 해남읍-마산면-황산면-문내면-화원면으로 시위를 이어감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2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오전 해남읍-옥천면-계곡면-강진읍-영암읍-목포시로 시위를 이어감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2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군부대에 발포 명령 연기를 요청하며 시위대 공식 해산함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3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새벽 1시 무렵 옥천면 우슬재에서 계엄군과 전투가 전개됨
전개 시기/일시 1980년 05월 24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해남읍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대치가 있었으나 해소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06월 13일 -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 기념하여 해남 지역 8곳에 5·18 기념 시설물 설치
성격 민주화운동
관련 인물/단체 해남군청년회의소

[정의]

1980년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전라남도 해남군 일원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

[역사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망하는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들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고, 이어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10·26사건 발생 때부터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까지의 기간이 바로 ‘서울의봄’으로, 전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각계각층의 시위가 전개된 시기이다.

1980년 봄, 전라남도 광주시를 비롯한 전라남도의 각 대학교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되자, 광주에 배치된 제7공수특전여단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경과]

1980년 5월 21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는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들은 해남청년회의소[회장 황용택]가 주도하여 12시 30분 무렵 대흥사에서 긴급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때마침 오후 2시 30분 무렵에는 광주에서 온 시위대 버스 한 대가 해남읍에 도착하여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이날 해남청년회의소 회원들은 1. 민주 인사 석방 및 민주 회복, 2. 독재자 추방, 3. 농어민 보호정책 활성화, 4.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보상, 5. 계엄 해제 등 다섯 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해남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급히 해남읍으로 향하여 오후 3시 무렵에는 약 3,000여 명의 해남 군민들과 함께 해남교육청 앞 광장[현재의 군민광장]에서 성토 대회를 개최하였다.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군민들은 시위대에게 김밥과 물을 나눠 주며 함께하였다. 오후 5시 무렵 광주에서 또 다른 시위 차량이 해남읍에 들어와 광주의 계엄군 발포 소식을 전하자 시위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후 광주에서 온 버스는 해남의 청년들을 싣고 광주로 향하였다. 오후 7시 무렵 시위대의 차량은 해남읍을 시작으로 삼산면, 화산면, 현산면, 북평면, 송지면을 경유했으며 완도읍까지 시위를 이어 나갔다.

5월 22일, 대흥사로 철수했던 시위대는 새벽부터 해남읍, 마산면, 황산면, 문내면, 화원면을 돌며 시위를 벌였고, 오전에는 해남읍, 옥천면, 계곡면, 강진읍, 영암읍, 목포시로 시위를 이어 나갔다. 이들은 시위 도중 계곡지서·옥천지서·화산지서·월송지서·월안지서·우수영지서 등 6개 경찰지서에서 무기를 획득하였고, 오후 5시 30분 무렵에는 해남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한편, 해남군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상부로부터 받은 발포 명령을 명분으로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고, 시위 지도부는 발포 명령 연기를 조건으로 시위대를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시위대가 공식적으로는 해산하였지만 시위대의 상당수는 시위를 이어 나갔다.

5월 23일 새벽 1시 무렵, 옥천면 우슬재에서 계엄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31사단 2대대 대장이었던 장윤태는 사망자가 두 명이라고 하였으나, 전투 참여자와 목격자들은 네 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전투의 계기도 서로 상대방의 선제공격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우슬재전투 이후 해남읍안동리 국도, 복평리 국도, 상동리고개, 백야리 등에서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다.

5월 24일에는 완도에서 해남으로 오던 시위대가 군병력과 대치하며 총격전 직전까지 갔으나, 군부대장과 해남읍장의 설득으로 긴장이 해소되었고 그것으로 해남에서의 5·18민주화운동은 마무리되었다.

[결과]

1980년 해남 지방 5·18민주화운동은 군부대와의 충돌이 있기는 하였으나, 평화적인 시위로 끝이 났다. 하지만 광주에서의 5·18은 신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신군부는 해남 시위의 책임을 물어 박충렬, 이병수 등 열두 명을 검거하여 법정에 세웠으나 대부분 집행유예나 형면제의 처분을 받았다. 1981년 해남읍교회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항쟁1주년 기념식을 시작으로 해남에서는 1980년 5월의 해남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전두환 정권 치하의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1980년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이어 가기는 쉽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5·18민주화운동이라 하면 광주에서만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해남을 비롯한 전라남도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해남에서도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많은 사람이 일어났으며, 군민들은 음식물을 공짜로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하였다. 1980년 5월 해남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 기억 자체도 흐려지고 있다.

1998년 6월 13일 해남군에서는 5·18 정신 계승을 위해 5·18 기념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설치 장소는 해남읍 군민광장, 대흥사 입구, 우슬재 잔디공원, 우슬재 정상, 해남중학교, 해남 군부대 앞, 대흥사 여관 터, 상등리 국도변 등 여덟 곳이다. 2016년 전라남도에서 5·18 시설물 정비 사업을 실시하여 시설물의 문구를 새롭게 정리하였고, 해남에서도 5·18 시설물 여덟 곳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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